대기업의 오픈이노베이션과 CVC는 왜 실패하고 있나 두번째 이야기.
경영진의 생색내기와 담당 실무자들의 스타트업에 대한 몰이해가 실패의 한 이유라면 그만큼의 무게를 가진게 우리나라 특유의 ‘우리’라는 기준에 따른 이슈다.
우리라는 표현은 영역을 치는 행위다. 우리에 포함된 사람은 내 집단이지만 우리가 아닌 사람은 외부인이다. 우리는 조건이나 상황과 관련없이 챙기고 돌보고 도와주고 옹호해야할 대상이지만 외부인은 배척하고 피하고 연결되면 안되는 대상이다. 언어에서조차 이 구분이 매우 강하게 드러나는 대표적인 언어가 한국어이고, 한국 문화의 특색이다.
이 자체는 그저 문화적 특색일뿐이라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여기서 파생되는 것들인데, 이게 경제 단위에서도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대기업들의 사일로. 보통 사일로라고 하면 한 조직내에서 사업부간에 서로 교류나 협업하지 않고 갈등이나 경쟁 관계에 놓이면서 한 조직이라는 점에서 확보될 수 있는 시너지를 망가뜨리는 경우를 의미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이 이것을 자기들의 밸류체인 전체에서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가령 소부장 업체라고 할 경우 국내 초대형 업체 한 곳과 거래를 시작하게 되면 높은 확률로 그 초대형 업체의 경쟁 대기업과는 거래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 대기업이 국내 업체를 발굴해서 SCM에 포함시킬 경우 그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부품이 필요한 대기업은 국내에서 다른 소부장 업체를 찾아내서 역시 자신들과의 독점 거래를 요구하거나 심한 경우 해외에서 수입선을 알아봐서 가져오지 절대로 자신들의 경쟁사 SCM에 포함된 업체에게 공급받지 않으려고 한다. 이게 소부장이나 테크 제조에서만 그런게 아니라 일반 소비재를 포함한 거의 전 영역에서 나타난다.
개별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해당 대기업의 ‘우리’라는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에 케어를 받을 수 있게 되고 안정적인 매출을 확보하게 되지만 여기에 안주하는 순간 시장 크기가 사실상 고정되어 버리고 수익률은 매년 대기업의 납품가 인하 압력에 낮아지면서 자생력을 잃어버리는, 지분 관계는 없지만 사실상의 종속 회사가 되어 버린다. 일본애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인데 그걸 고스란히 우리나라 기업들도 하고 있는 것. (일본식 봉건 영주와 봉신의 관계같은 것이다. 토요타의 SCM 등 자동차 기업들에게서 이런 경향성을 매우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이제 이게 왜 스타트업과 연계가 되고 오픈이노베이션이나 CVC 영역에 악영향을 주는지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업체 줄세우기 문화는 스타트업들과의 관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아, 물론 미국 대기업들도 스타트업들 줄 세운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미국 대기업들은 자기들이 다수 지분을 갖기 전까지는 해당 스타트업이 자기의 직접 경쟁사와 협력하는 것 정도만 피해주면 그 외의 거래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보다 더 통제하고 싶다면 그냥 다수 지분을 사들여서 계열사와 비슷한 지위로 공식화시킨다는 점이다. (미국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가 전체 스타트업 투자의 40% 수준으로 높은 이유. 국내는 20%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대기업의 줄세우기는 지분 투자로 리스크는 떠안지 않으면서 계약 관계인데 종속 관계를 강요한다는 점이 문제다.
스타트업, 특히 B2B 스타트업의 경우 처음에는 ‘우리나라가 매우 잘하고 있는 거대한 세계 수요가 있는 산업이니 내 사업도 금방 커질거야’라고 출발하지만 시장을 들여다보고 거래 관계를 만들어가다보면 ‘전체 시장은 큰데 대기업들간에 과점 시장이고 어느 한 업체랑 거래를 트면 다른 곳이랑은 거래를 아예 못하게 되니 실상 시장 규모는 얼마 안되네?’ 라고 깨닫게 된다.
거래뿐 아니라 오픈 이노베이션이나 CVC 투자 역시 많은 경우 대기업들은 다른 대기업의 ‘손때’가 뭍은 스타트업과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니 정말 기술력이 좋거나 역량이 높은 스타트업은 대기업과의 오픈 이노베이션에 참여해도 얻게 될 기대 이익이 별거 없어서 해외에 거래처를 확보하거나 적당히 사업화한 다음에 매각하는 정도의 에너지만 투입하게 된다.
대기업들도 오픈 이노베이션 같은 것을 해도 오는 스타트업들이 기대보다 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심한 경우 오픈 이노베이션이나 전략적 투자를 해봐야 국내 스타트업에서는 얻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대규모 투자를 수행할 조직을 해외에 만든 후에 해외 스타트업을 주로 찾는다. 막상 이들의 기술력이나 사업 역량이 탁월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딜소싱 측면에서 훨씬 유리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국내 스타트업은 대기업과 협업 관계에 종속될 걱정이 큰 경우엔 아예 대기업을 안찾아가지만 해외 스타트업들이 보기엔 국내 대기업의 해외 스타트업 투자 펀드는 그냥 유명한 기업체의 투자일 뿐이니 대기업 입장에서 딜소싱의 난이도가 차이가 나게 된다.)
여기서 생겨나는 비극이 대기업은 신성장을 함께 도모할 스타트업을 해외에서 찾게 되고, 국내 스타트업들 역시 대기업에 종속적인 관계에 놓이기 싫고 시장 규모나 성장성에서 제약되는 것이 싫어서 잠재력만 있다면 해외에 최대한 나가려고 한다는 점이다. 가까이에 있는 기회는 서로 피하면서 멀고 불투명한 기회들만 찾는 셈. 당장 SaaS 나 AI 분야 스타트업들이나 모빌리티 등과 관련된 스타트업들의 고객 기반 및 행태를 살펴보면 이런 점이 손쉽게 확인된다.
예전 우스개 소리 중에 길거리에서 한 커플이 마주 걸어오는 커플을 보게 될 경우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두 커플의 남자들도 상대편의 여자를 쳐다보고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서로 쳐다봐서 남자가 상대편 남자를 볼 일은 없다는 이야기인데, 이게 우리나라 대기업과 스타트업 사이의 관계처럼 생각되어진다.
대기업이 그저 뉴스용으로 오픈 이노베이션 등을 추진하면서 진심이나 이해가 없는 상태로 스타트업을 만나고, 이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기존의 ‘납품사’ 수준의 종속이라면 능력되는 스타트업이 이들과 정말 진지하고 장기적인 협력 관계를 만들려고 할까?
상대에게 원하는게 있고 강력히 통제하고 싶다면 최소한 지분 투자든 아니면 아예 M&A를 해서 함께 리스크를 떠안아야 하고, 그러지 않을거면 아예 스타트업과 관련없이 그냥 새로운 기술과 시장을 자력으로 도전하는게 멋진 태도다. 거래관계를 통해 상대를 통제하려고 하는 건 너무 치사한 방법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