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스타트업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 1.
2015년 이전에 스타트업에 대해 투자를 하는 대기업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삼성전자, 현대차 같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나 GS 같이 소비 시장 변화에 예민해야 하는 리테일 그룹, 그리고 콘텐츠와 IT 기술의 빠른 변동을 사업 기회로 연결해야 하는 네이버나 카카오, 3N 같은 대형 IT 기업들 정도였다.
그러다 사드 사태가 터지며 해외 시장에서 성장 동력 발굴이 어려워진 수많은 대기업들이 스타트업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AR/VR, AI, 블록체인 기반의 핀테크, 모빌리티 등의 키워드가 떠오르며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는 기하급수로 늘어났고,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절정기를 맞는다. 정말 손으로 꼽을 정도의 투자 건수가 전부였다가 10여년 사이 300대 기업의 절반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스타트업과 협업을 추진하고 투자를 집행하는 시대가 펼쳐지게 되었고, 덕분에 국내 스타트업 투자의 20% 이상을 대기업 자본인 상황이 되었다.
다만 미국의 40%대에 비하면 여전히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는 제한적인 상태이며 23년 이자율이 크게 올라가면서 스타트업에 대한 대기업의 관심이 확연히 줄어들고 있음이 여러 신호로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 전후 활발하게 추진되던 스타트업과의 투자나 협력 방안들, 즉 사내벤처-오픈이노베이션-자본투자-CVC-M&A 등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경영진들의 관심도 급격하게 식어버렸다. 그리고 여기서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제대로 활용하는 첫번째 방법이 나온다.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통해서 새로운 성장 기회를 찾기 위한 가장 기본은 ‘일희일비’하지 않고 길게 보는 것이다.
애플은 매년 10여개의 스타트업을 M&A한다. 비밀주의적 성향이 강한 기업 특성상 외부 업체와의 오픈 이노베이션이나 CVC, 지분 투자 등은 하지 않고 필요하다고 판단한 스타트업이 있으면 그냥 비싸게 주고 매입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들이 M&A를 한 회사들의 면면을 보면 상당한 인사이트를 준다.
가령 2010년에는 ‘Siri’ 사를 사들였고, 1년 반 뒤에 이 이름을 그대로 딴 퍼스널 어시스턴트 서비스를 아이폰의 핵심 기능으로 출시한다. 시리 매입과 같은 해 폴라로즈라는 어려운 이름의 회사를 사들이는데, 이 회사는 안면 인식 기능을 개발하던 스타트업이었고, 만 7년뒤 아이폰에서 지문이 아닌 안면 인식을 통한 사용자 확인 기능을 출시한다. 16년에는 Indoor.io 라는 회사를 인수하는데, 실내 공간을 매핑해서 사용자의 위치를 확인하고 네비게이션을 돕는 소프트웨어 개발사였다. 그리고 이 기술은 내년 출시될 것이라 발표된 애플 비전 프로 제품에 주요 기능으로 탑재되어 있다.
애플은 수많은 기술을 내부로 가지고 있는 회사지만 내부 R&D만 전적으로 의존해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특히 시도해보지 않은 영역의 기술들은 외부에서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이를 신제품, 신기능에 추가해서 성장 가능성으로 연결시킨다.
애플 내부에서도 말이 많을 것이다. 내부에서 R&D 하고 있는 개발자들의 주제와 겹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M&A를 수행한 부서와 내부 개발 혹은 제품 기획 부서와 불협화음이 나는 경우도 많을 것이며, 분명 위 예시처럼 성공한 사례보다 실패한 사례가 더 많을 것이다. 당연히 CVC나 단순 지분 투자가 아니라 M&A이기 때문에 오버 프라이스로 과다 지불했다는 비판도 역시 따라올 것이고, 경영진이 M&A 당시에는 지원했지만 이후 해당 기술에 관심이 식어서 인수되어 들어온 인력들 입장에서 불만도 생길 수 있을게다. 하지만 애플이 지난 15년 이상 보여준 트랙 레코드를 보면 1회성의 소모적 인수 또는 당장 1~2년 뒤를 내다보고 하는 인수보다 5~7년 이상의 장기간에 걸쳐 이 기술들을 내재화하고 제품에 적용해서 시장에 임팩트를 주는 노력을 하고 성과를 내는 태도를 보여준다.
코로나 시기 온라인 비대면이 대세를 이루니까 우루루 몰려가서 스타트업과 뭔가를 해보자고 했다가 열기가 식으니까 그냥 금방 빠져나오면서 나몰라라 하는 식의 태도로 스타트업과 실제 성과가 있는 협업이나 투자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대기업 대부분이 오너 기업이고, 오너 경영의 최대 장점이 ‘긴 시간에 걸쳐 성과를 만들어내는 long-term commitment에서 전문 경영인보다 유리하다’는 것인데, 막상 애플의 사례에서 보듯 전문 경영인이 하더라도 얼마든지 장기간에 걸친 활용을 해낼 수 있는 반면 우리나라 오너 기업들의 변죽은 죽 끓듯 단기에만 맞춰져 있다. 애초에 스타트업 활용 방안들이 전략적이고 장기간에 걸친 시각이 아니라 그냥 남들이 한다니까 우리도 해야하지 않을까 또는 뭔지 모르겠는데 성공하는 애들도 있다니까 우리도 해보자 정도로 시작하고 그래서 성과가 안나오면 금방 꼬리를 내리는 식으로 투자를 하니 성과가 더욱 안나오는 악순환인 셈이고, 그나마 투자 규모라도 크면 이해를 하겠는데, 매출액의 1%도 안되는 수준의 투자로 외부에 생색만 낸다. 이러니 스타트업 업계에서도 대기업을 믿지 못하고, 대기업도 국내 스타트업에게 별로 기대를 안한다.
스타트업 활용 전략은 대기업이 신성장 동력을 찾고 새로운 임팩트 요소를 찾는 ‘전략적 선택’이고, 모든 전략적 선택들이 그러하듯 장기간에 걸쳐 수많은 실패를 버텨내며 발전시켜 가야 성과가 나오는 일이다. 유행한다니까 소액 한 두번 찔러보는 식으로 신성장 동력은 절대 발굴되지 않는다.
("그러니 투자금을 늘리라는 뜻이냐" 같은 식으로는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투자금 규모는 어디까지나 commitment의 결과지 그 자체가 도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