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자아실현
여기 그럴싸한 거짓말이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지겹도록 들은 이 말은, 잠복기를 거쳐서 직장인이 된 후에 비로소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이 말은 직업과 기업에 대한 오해에서 출발해서 우리 스스로를 의심하고 괴롭히게 만듭니다.
바로 "직업은 자아실현의 방법", "회사는 자아실현의 장"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이 시스템 속 유일한 가치 판단 기준은 어떤 물건/서비스에 나의 금액을 지불하고 싶은가, 아닌가입니다. 즉, 팔리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겁니다. (다만 모든 것이 상품 가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절대로 상품화시키면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이나 사람에 대한 헌신 등등입니다. 자본주의와는 다른 레벨에 있는 본질적인 것이며, 당연히 오늘 우리의 논의 대상에서는 제외됩니다.)
그리고 직업이란 물건이나 서비스를 만들고, 시장에 판매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말합니다. 다만 물건과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초기 투자가 필요합니다. 신발을 만들려면 신발 공장이 필요하고, 국밥을 팔기 위해서는 주방과 식당이 필요하며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발비가 투입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큰 자본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투자 비용을 상품으로 바꾸는 일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노동'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드립니다. 누군가의 자본을 상품으로 바꾸는 일은 '노동', 노동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사람을 '노동자'라고 부릅니다. 굉장히 명쾌하고 심플한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우리가 익히 들었던 '자아실현'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정리하자면 노동은 다른 누군가가 투자한 돈이 상품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일 뿐 자아실현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상품이 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느냐 혹은 할 수 있느냐에 따라 차등적인 대가를 받을 뿐이죠.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겠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시장에서 안팔리면 그냥 휴지통으로 갑니다.
그럼 우리는 왜 ‘직업 = 자아실현’이라는 망상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자본이 실제 시장에서의 교환가치가 되기 위해 노동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될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해야하고, 그들이 더 열심히 일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효율적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교육에서는 '직업 = 자아실현'이라는 말을 강조한 것이죠. 애당초 공교육이라는 것이 19세기 중반에 탄생한 개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 시기를 지나, 도시가 더 이상 시골에서 노동력을 가져올 수 없게된 시점에서 안정적인 노동자(=노동력) 공급을 위해 탄생한 공공 서비스가 바로 공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직업을 자아실현으로 여기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마음 편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커다란 시스템 속에서 그저 하나의 부품에 불과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이 날짜되면 들어오는 월급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은 너무 잔혹하기 때문입니다. 뼈 마디를 직격하는 팩트폭력인거죠.
물론 60년전 피터 드러커가 예언했듯 현대 자본주의는 19세기와는 많이 다릅니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노동자이지만 투하된 자본보다도 더 많은 교환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자기의 지식과 인사이트로 말이죠. 이런 사람들을 지식노동자라고 부릅니다. (지식 자체를 파는 장사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개인이 가진 지식과 지혜를 이용해 가치가 없거나 미미한 상품을 고부가가치로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지식 노동자는 자기의 지식과 시간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그 투입 과정을 통해 더 큰 지식과 인사이트, 네트워크, 평판 등이 생겨납니다. 투입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가 더 커지지요. (대기업의 전문 경영인이나 대학병원의 의사, 나영석 PD 같은 사람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자아실현의 의미가 자기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그 과정을 통해 성숙과 성공을 맛보는 것이라면 이 분들에게는 “직업 = 자아실현”이 맞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은 언제나 소수라는거죠. 이 정도의 능력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는 직업과 자아실현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냉정히 말해 직업이란 그저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왜 내 직업은 만족감도 주지 않고,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아 소진같은 느낌이 들까."라는 의문은 전제부터가 어긋난 것이 됩니다. 애당초 직업이라는 것 자체가 자아실현이라는 가치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가치를 만들 정도로 능력있는 사람은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극히 적은 일을 바라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너무나도 슬프고 또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업은 여러분의 자아실현을 위한 조직이 아닙니다. 기업의 공식적인 목표는 딱 하나, “투입된 자본의 수익률 향상” 입니다.
물론 이러한 Return on Equity(ROE, 자기자본이익률) 혹은 Return on invested capital(ROIC, 투하자본수익률) 항목은 장기적인 목표입니다. 회사가 장기적으로 많은 수익을 투자자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는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급여를 줘야하기도 합니다.
노동자들의 숙련도나 인사이트가 필요하면 그에 걸맞는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과정도 필요해지지요. 이건 다 돈입니다. 이런 비용까지 다 포함해서 장기적으로는 돌려받으려는게 기업이고 투자자입니다.
기업은 ROE를 위한 기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기업이 ROE를 추구하는 방법은 기업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좀 더 노동 친화적인 기업도 있고,굉장히 가혹한 기업도 있고, 내부 경쟁을 부추기는 곳도 있고, 불법과 갑질로 점철된 기업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환경과 문화를 가진 곳이라고 해도 기업은 기업입니다. ROE가 아닌 사회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조직도 있습니다. 그런 곳은 기업이라고 부르지 않고, 비영리법인이라고 부르죠.)
경제성장률이 10%를 넘나들고 아직 개척하지 않은 시장이 많았던 시절, 기업들은 만성적인 인력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사람들이 일하는 것보다 회사가 크는 속도가 빨랐고 국가 전체의 경제 성장은 더욱 빨라서 노동력 공급 부족에 시달렸으니까요.
그래서 그 시절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우리 회사에 입사부터 시킵니다. 그리고 맨날 사고치고 일 좀 못해도 경험이 쌓일 때까지 기다려주고, 그래도 부족한 것은 교육으로 메꿔주고 기회도 주면서 사람을 키웠습니다.
거창하고 철학적인 자아실현은 무리지만, 그래도 삶에 대한 계획을 세우면서 미래에 대한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 또한 충분히 좋은 자아실현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의 글로벌 HR 트렌드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애당초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준비된 사람을 뽑습니다. 입사하자마자 업무를 주고, 성과에 따라 거대한 인센티브와 즉각적인 승진으로 보상합니다. 반면에, 역량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일 못해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교육을 시키지도 않죠. 직원이 아니라 마치 프리랜서처럼 대하는거죠.
이런 방식이 효과를 가지기 위해서 기업은 구성원에 대해 존중과 냉정함이라는 상반된 측면을 제대로 갖춰야 합니다. 직원은 더 이상 회사에 뼈를 묻는 일꾼, 혹은 식구가 아닙니다. 능력에 따라 언제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존재들이니 명시적인 계약 조건. 즉, 언제까지 어떤 아웃풋을 만들어낸다는 약속만 지켜진다면 그 외 부분에는 직원의 삶에 개입하지 않아야 합니다. 출퇴근을 언제 하든, 반바지를 입든 말든, 주말 등산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는 직원의 자유이므로 강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직장인에게는 소위 이런 '쿨'한 관계가 좋은 기업문화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정 시점까지 기대되는 아웃풋을 내지 못했을 경우에는 '쿨하게' 쫓겨날 각오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문화가 점차 자리잡게 되면,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더욱 해당사항이 없어집니다.
경쟁력 있는 극소수는 어느 기업에서나 본인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며, 시간이 지날 수록 역량은 축적될 것입니다. 이들 입장에서는 예전처럼 한 회사에 목매던 시절보다 훨씬 자아실현이 용이해지고 보상도 커집니다.
하지만 본인의 역량으로 유의미한 차별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 펼쳐질 것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IMF 이후 우리 사회에 비정규직이 얼마나 많이 생겨났고, 그들의 삶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아실현 같은 것은 사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이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기를 쓰는 것도, 공무원 시험에 목매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직업과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면
마음이 건강해집니다
요약을 좀 해보겠습니다.
직업은 개인에게는 급여를 버는 수단이며,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투입된 자본의 상품화를 진행시켜 그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직업은 자아실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직업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소수이며, 언제나 소수입니다. 로또 당첨되는 사람은 몇 명 안되는데 모두 1등을 꿈꾸며 로또를 사는 것과 같은 겁니다. 우리 대부분은 복권사는게 현명한 투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아는데, 직업에도 똑같이 잘못된 기대를 투영하는 겁니다.
최근 HR 트렌드는 능력 있는 사람 뽑아서 줄 것 주고, 아웃풋 뽑아낸 후 쿨하게 작별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주도권을 가져올 정도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대다수는 그저 시스템 속 부속품으로 일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아실현 따위는 판타지일 뿐입니다.
성공한 소수가 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막연한 판타지를 버리고 철저하게 실리적, 계약적인 관점으로 기업과 직업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기업 밖에서의 자아실현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고 마음도 한결 더 편해집니다.
몽상가가 아닌 Professional이 되십시오. 받는 만큼 일하면서 나의 포트폴리오를 형성하십시오. 그리고 평판과 네트워크도 쌓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직업이며, 이렇게 쌓아올린 역량을 통해 더 나은 무대에서 나의 꿈을 현실화하는 것이 바로 진짜 자아실현입니다.
직업은 자아실현의 도구가 아니고, 자아실현의 도구를 마련하는 수단입니다
(이 글에 대해 제가 전달하려는 의도와 다르게 해석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도 있어서 추가 글을 썼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brunch.co.kr/@curahee/45)
1. 슬기로운 직장생활 페이스북에서 더욱 다양하고 현실적인 커리어 이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facebook.com/suljikcareer/
2. 미매뉴얼에서는 내가 가진 성향에 대해 더욱 깊게 분석하고, 알맞은 조언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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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슬직 운영사 패스파인더넷에서는 관련 강연, 커뮤니티에 대한 소식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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