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성규 Nov 03. 2018

3. 안녕, 내 이름은 벼리야. 너는 어디서 왔니.

아이들과 함께 걷는 세상 3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마땅한 또래의 친구도 없이 상하이에서 맹탕 시간을 보냈던 큰 아들에게 1년 만에 다시 시작된 학교 생활은 즐거움 그 차체였다.

서당에서 3년을 보낸 풍월을 읊는 서당개만큼은 아니었지만 1년 동안 중국어의 듣기 공부만을 반 강제적으로 했던 큰 아들은 중국어 레벨 테스트에서 중급을 받았다.

첫날 학교 교실에는 한국을 비롯한 독일과 미국, 쿠바, 그리고 일본 등 각국의 듬직한 남학생들과 우크라이나, 투르크메니스탄의 어여쁜 여학생까지 다양한 국가에서 온 학생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가득한 메시지를 보내온 큰 아들 벼리에게 나는 한 가지만 명심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교실에 들어가서 구석에 앉은 채 조용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부끄럽고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도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해야 한다고. 그 하나만 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말이 쉽지 각기 다른 언어를 하는 외국인들에게 먼저 다가선다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를 가진 아이가 아니고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지만, 첫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의외였다.

같은 반에 있는 모든 아이들의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메신저의 아이디를 받아 단체 채팅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큰 아들 벼리의 첫날은 향후 벼리가 매번 마주치게 되는 새로운 인생을 즐기게 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경험이었다.



큰 아들이 만든 단체 채팅방은 큰 아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야기가 오갔다. 학교에서 전달사항이 있을 때 학교의 교수들조차도 그 단체 채팅방을 이용할 정도였다.


17살이라는 미성년자의 나이로 언어 연수반에 들어간 아들은 반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기의 나라에서 대학을 마치고 왔거나, 아니면 휴학을 하고 온 25세 이상의 성인이었다.

수업 첫날 큰 아들이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고 전화번호를 교환한 일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빠르게 소문이 퍼져 나간것 같았다.

남들보다 피부가 조금 검은 편에 속하는 벼리를 한국인이 아니거나, 교포 2세라는 이야기가 돌았고, 부모님이 외교관이라 해외에서 살다가 온 아이라는 둥, 원래부터 해외에서 있던 애라는 둥, 출처 불명의 소문이 큰 아들을 둘러싼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그런데, 이런 소문이 비단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만 생긴 것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적극적이라고 하는 서구권 유학생들 조차, 큰 아들이 한국인이 아니라 서구권에서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사귀는 데에 스스럼없는 서구의 학생들조차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큰 아들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큰 아들 벼리의 말에 따르면 서구권 아이들이 의외로 소극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어쨌든 큰 아들의 활약으로 아들이 속해 있는 반은 다른 반에 비해 항상 활기가 넘치고 새로운 일이 가득했다.

채팅방으로 통헤 기본적인 소통이 이루어지고, 그것으로 실제 교류가 빈번해지니 함께 어울려 하는 일이 많아져 교실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던 모양이었다.

그런 벼리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조금 걱정이 되는 것도 있었다.



나는 아들과 한 가지 약속을 다시 했다.

뭘 해도 상관이 없으니, 학교는 빠지지 않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해진 수업만이라도 열심히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해외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학생들의 생활이 어떠한지는 20년을 넘게 해외에 있으면서 몸소 겪고 보아 온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들이 성적은 좋지 않더라도 수업만은 빠지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친구가 필요했던 큰 아들은 학교에 가는 것을 마치 동네 피시방을 가듯 즐거워했다. 학교에 가서 수업을 하고,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돈을 거두어 한 번씩 고급 레스토랑을 찾아 가며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을 하나씩 익혀가고 있었다.


그렇게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한 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하는 날, 큰 아들은 당당히 장학금을 받아 왔다. 장학금을 받은 사실에 우리도 놀랐지만, 본인은 더욱 놀라워했다. 6개월을 친구들과 놀기만 했는데 최고의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은 것이었다. 사실 종강식을 하면서 장학금 명단을 발표할 때조차 큰 아들 벼리는 뒷자리에 앉아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노느라 자기가 장학금을 받았는지 모를 정도였다. 급기야 종강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벼리에게 장학생 이름을 부를때 벼리의 이름을 들었던 것 같다는 몇몇 친구들의 말에 부랴부랴 교무처로 달려간 벼리는 반신반의하며 확인을 해 보았다. 물론 장학생 명단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 할 정도로 벼리는 스스로 장학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학교를 가기 전 1년을 놀면서 큰 아들 벼리가 했던 단 두 가지의 일은 검정고시의 패스와 HSK 5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것이 큰 아들에게 주어진 1년간의 의무였다.

고등학생이 1년 동안 해야 할 시험에 대한 의무 치고는 소박하다 못해 가소로운 것이었다.

어쨌든 큰 아들은 고졸 검정고시(사실 어느 정도만 하면 쉽게 통과하는 고시)를 어렵지않게 통과하며 1년간의 의무 가운데 하나를 이수했고, 남은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HSK 시험을 봐야했다.


HSK시험은 영미권의 토플과 같은 성격의 중국어 수준 평가 시험인데, 중국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급수를 받아야 했다.

총 6개의 급수가 있었고, 6급이 가장 높은 급수이며, 중국의 인문 계열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최소 4급 이상을 받아야 했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는 5급이상이 있어야 했다. 처음부터 5급은 힘들다며 1차적으로 4급 시험을 목표로 공부했던 벼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의 접수처에 접수를 하러 갔다.

시험 접수처에 함께 갔던 나는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하다 4급이 아닌 5급을 신청하게 했다.

최고 점수로 4급을 통과하기는 어려운데, 최소 점수로 5급을 통과하기는 쉽다는 나의 어설픈 논리에 큰 아들도 아무 생각 없이 신청을 했고. 아무 생각 없이 시험을 쳤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조건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되면 다시 보면 되는 것이었다.

어떠한 중국어 수업이나 과외를 받지 않고(사실 간간히 내가 알려 주기는 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시험을 본 결과 5급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5급에 근근이 붙은 점수였지만, 결론적으로 4급이 아니라 5급 자격증을 받은 것이었다.


그렇게 한 학기 언어 연수를 마치고 장학금까지 받아오자 나는 큰 아들을 데리고 또다시 HSK 시험 신청을 하러 갔다.

큰 아들은 저번에는 가까스로 운이 좋아 5급을 받았으니 이번에는 높은 점수의 5급을 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더 5급을 신청하려 했다.

나는 다시 아들을 꼬드겼다.

어차피 그냥 치는 시험인데 6급을 도전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붙었던 5급 시험도 운이 좋아서 어렵게 붙었기에 이번에 5급을 다시 붙는다는 장담도 할 수 없다며, 이왕 보는 시험 HSK 시험의 최고 등급이 6급인데, 만약 떨어지더라도 최고 등급 시험에서 떨어졌다는게 좀 더 폼이 난다는 논리였다. 게다가 5급은 한 번 쳐 봤고, 6급은 경험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문제가 어떻게 나오는지 확인을 해 보는 것도 좋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로 회유를 했다.

그렇다. 나를 비롯한 아들은 HSK 전문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6급 시험이 어떤 형태인지 어떤 유형의 문제가 나오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큰 아들은 나의 탁월한 논리에 별 거부 없이 바로 6급을 신청했고. 높은 점수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6급을 받아왔다.

누가 보면 우리 큰 아들이 천재일 것이라는 말을 하지만,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친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성적이 꼴찌였다는 것을 보면 천재는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상하이 와이탄에 서있는 벼리

언어연수 1학기를 마치고 3개의 등급으로 나뉜 중급반의 가장 기초인 1반에 있던 큰 아들은 2학기부터 두 단계를 뛰어넘어 바로 고급반으로 들어갔다.

역시 첫날은 이름과 자기소개를 먼저 하는 적극성으로 단번에 반 전체의 주목을 받았다.

나이도 어리고 왜소한 체격을 가진 큰 아들을 독일에서 온 친구들과 미국 친구들이 자주 데리고 다니는 것 같았다. 헬스클럽에 데리고 가 운동을 시키고 각종 모임에 참가를 시켰다. 물론 금요일 밤이 되면 광란의 파티에서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시고 노는 것 역시 빠지지 않았다.

법적으로 성년이 되지 않은 아들이 클럽이나 펍에서 술을 마시는 것에 주변의 다른 한국 지인들이 걱정스러운 우려를 보내왔다.

그렇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일주일을 열심히 살고 그중 단 하루인 금요일 밤에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이, 게다가 정직하게 나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또래(보다는 여전히 어리지만)들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각기 다른 국가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약 내가 그걸 못하게 한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아들은 갈 놈이었다.

어찌했던 그렇게 큰 아들 벼리는 상하이라는 국제 도시에서 우뚝 서고 있었다.




 큰 아들이 기어 다니는 어린 시절. 나는 아직 의대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다. 작은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쳐 두고 해부학에 머리를 싸매던 나에게 아이를 동시에 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림이 많이 나온 의학책을 던져 주고 내 공부에만 다시 열중했다. 책이라는 것을 쉽게 찢어지는 장난감 정도로 여기던 어린 나이의 큰 아들은 기어 다니며 책을 가지고 놀았다. 침을 묻히기도 하고 찢어 버리기도 했지만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말 그대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지고 노느라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아들은 어려서부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셜록이라는 추리 소설을 시작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일본 추리소설에 빠져 들더니 나중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중에 나온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한편도 남김없이 다 보자 이제는 한글로 자막이 나오지 않는 애니메이션을 원어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니 사전을 찾아가며 봐야 했다. 공부를 할 시기에 그런 것에 시간을 보내게 되니 성적은 당연히 곤두박질을 쳤다. 물론 애니메이션을 보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야단 칠 수 있었으나, 나는 그것보다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나도 같이 보기로 한 것이다. 억지로 본게 아니라 정말 재미있게 보았다.

못 보게 하는 것보다, 지금 내 아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 어떤 내용인지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단순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하기에는 나름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긴 것들이 많아 나도 점차 그 속에 빠져들게 되었던것 같다.

비슷한 취미가 생기다 보니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이 생기게 되었고, 내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애니메이션을 추천하기도, 또는 아들에게 추천받기도 했다. 물론 아이들이 보기에 좋지 않은 내용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못 보게 하거나 야단을 치지는 않았다.

단지 그런 장면이나 상황에 대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큰 아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돌려서 대화를 하는 쪽을 선택했다.

아들은 이미 웬만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자막 없이도 볼 수 있는 실력이 되었고, 상하이에서 만난 일본 친구들과 비슷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많아지게 되었다. 물론 일본어를 사용해서 말이다.

아들은 어떠한 전문 교육기관을 거치지 않고 영어, 일어를 구사하며 친구를 사귀고 취미생활을 공유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2. 아빠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