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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제작소 Jan 29. 2021

인간과 비인간, 진실과 거짓의 경계

드니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

1982년 개봉 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는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복제인간 리플리컨트가 등장한다. 영화 속 배경은 핵전쟁 이후 혼돈과 무질서로 휩싸인 2019년이다. 인간보다 뛰어난 신체적 특성과 인공지능을 탑재한 리플리컨트는 외형적으로 인간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우주식민지 개척을 위해 생산된 리플리컨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지구에 잠입한다. 이들이 인간의 사회 속으로 스며들었을 때 이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직업이 바로 블레이드 러너다. 생물학적 외형과 인간과 같은 혹은 그 보다 우수한 지적 체계를 가진 이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인류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중 하나였던 고전적인 분류형태를 벗어난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인간보다 우수한 신체적 능력을 가지고 만들어진 이들을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은 ‘기억’이다. 수명이 4년으로 제한된 이들에게 인간과 같은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식된 가짜 기억인가 아닌가를 통해 이들을 분류한다. 이 분류 방법을 통해 이들은 제거된다. 


이식된 기억과 체험에 의해 축적된 기억의 차이가 용도를 다한 가전제품을 수거하듯이 제거될 수 있느냐의 질문이었다. 

리플리컨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였다. 그들의 짊어져야할 노동의 무게와 처우의 개선이 아니라 인간과 같은 수명을 보장받기 위해 식민지 전투를 이탈하여 지구로 잠입한 것이다. 이들이 제거되는 기준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과 인류에 끼치는 해악에 기준한 것이 아니라 오직 ‘기억’의 유무에 의해 분류되고 제거된다. 


2017년 개봉 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는 30년 후를 다룬다. 2019년 이후에도 새로운 버전의 순종적인 리플리컨트들이 제작되고, 구모델을 제거하기 위해 더 우수한 버전의 리플리컨트들이 블레이드 러너라는 이름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30년이 지난 시간 동안에도 인간은 더욱 더 인간적이며 순종적인 리플리컨트들을 생산하고 제거하는 분류작업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이때도 분류기준은 ‘기억’이다. 그것이 비록 생산단계에서부터 이식된 기억일지라도 블레이드 러너는 그 기억의 차이를 통해 리플리컨트를 구분해 낸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리플리컨트를 통해 인간의 기준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식된 기억과 체험에 의해 축적된 기억의 차이가 용도를 다한 가전제품을 수거하듯이 제거될 수 있느냐의 질문이었다. 


드니 블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는 인간과 더욱 더 구분이 어려워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복제인간을 제거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그 와중에 여자 리플리컨트의 유골이 발견되고 출산의 흔적을 찾아낸다. 이제 리플리컨트는 인간에 의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단계에서 스스로가 종족을 생산할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이때에도 인간과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가 바로 ‘기억’이다. 

이식된 기억인가 체험을 통해 축적된 기억인가.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는 리플리컨트가 가진 기억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한 번 더 혼란스럽게 흔든다. 기억의 실체를 찾아 2019년 리플리컨트와 함께 사라졌던 블레이드 러너를 찾아 금단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1982년 리들리 스콧 감독이 <블레이드 러너>에서 던지고 남겨 두었던 질문을 드니 빌뇌브 감독이 유려하게 이었다. 잇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한 발 더 들어가서 그곳에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확장되고 깊어져 인간이라는 존재의 경계를 흐린다. 1982년 영화에서 성취했던 질문과 화려한 영상이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에서 더욱 더 압도한다. 


‘나는 누구인가’ 만들어진 인간과 태어난 인간에서 만들고 태어난 인간이 뒤섞인다. 가짜 기억과 진짜 기억으로 분류되던 체계 속에서 진짜 기억임에도 자신의 기억이 아닌 만들어진 인간과, 태어 났음에도 만들어진 인간의 아이가 뒤섞인다. 


30년을 지나 만들어진 속편의 영화가 전편과 유기적으로 잘 엮이며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더욱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기준은 희미해지고, 분류를 통해 제거할 것인가 조화롭게 살 것인가를 선택할 영화 속 미래가 기대와 함께 두려움으로 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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