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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저달 Feb 26. 2023

화석이 된 시간에 대한 두려움

갑자기 100번 글쓰기 23

IMF에 딱맞춰 졸업을 한 나는 취직에 꽤 애를 먹었다. 가뜩이나 그리 좋지 않은 대학에 국문과라는 타이틀은 활황기에도 명함 내밀기 힘든 조건이었는데 그런 사회적 악조건까지 준비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막막할 수밖에. 학교를 성실히 다녀서 이런저런 스펙을 쌓기는커녕 술만 퍼마셔댔던지라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지인찬스를 쓸 수 있는 인맥을 가지고 있는 부모도 아니었기에 혼자 고군분투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용감했네.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취업난에 대해 공감이 힘든 것은 이런 악조건속에서도 살아남으려고 했던 그날들 때문이긴 한데. 어떡하든 어디든 취업을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긴 한데. 다들 상황과 마음이 다른 것이니 뭐라 할일은 아니겠지.


할 수 있는 게 없는 나는 편집학원에 다니면 거기서 취업을 알선해준다고 해서 무작정 학원을 다녔다. 별로 배우는 것도 없었지만 수강료로 받았으니 어디든 취직시켜주겠거니 하는 가느다란 희망으로 다녔고 그들은 결국 내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이력서 한줄 늘어나게 하는 역할 정도는 했다. 어쨋든 한 줄 늘어난 이력서를 들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서 취직한 작은 출판사가 있었다. 반지하에 대학교재와 단행본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영세출파사의 전형이었다. 그래도 거기서 한글 편집을 제대로 배우고 출판 업무에 대해 어렴풋이 배울 수 있었고 여기서 배운 지식으로 근근히 먹고 살았던 것을 보면 참으로 고맙기 이를데 없는 곳이 아닐 수 없다. 그 이후의 직장들과 다르게 애착이 가고 기억에 많이 남는 나의 시작이 된 곳. 지금도 학원교재를 이리저리 건드릴 수 있었던 것도 그때의 그 짧은 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생각하면 정말 사람은 배운게 도둑질이고 커다란 계기가 있지 아니하면 지난 세월을 토대에서 벗어나기 어렵구나 싶다.


어젯밤은 어떤 생각에서인지 그 출판사가 아직도 존재하는지 궁금해져서 찾아보았다.

세상에. 아직도 수만번은 읊었던 그 전화번호 그대로에 대표자 이름도 같고 대상으로 하는 책도 여전하다. 심지어 그때 출판했던 익숙한 이름의 교수가 여전히 책을 내고 있었다. 책의 만듦새도 그때와 똑같이 어설프고 홈페이지도 그 주소 그대로이나 여전히 부실하다. 25년이 넘는 시간이 여기는 흘러가지 않은 것인가.

이토록 영세한 출판사가 아직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도 놀랍고 하나도 발전하지 않은 것에 더 끔찍하게 놀랐다.

그 시간동안 이 출판사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걸까. 좀 제대로 된 편집디자이너 한명 구해서 웬만한 수준의 책을 낼 정도는 되야하는 거 아닌가. 화석이 되어 버린 시간이 거기에 있었다.

당시 40살 안팎이었던 사장은 25년의 세월 출판사를 계속 운영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은 했을지언정 변화라는 것이 없이 초로의 사장님이 되어 있겠다.


결국 나는 그 시간 이후 어떤 발전을 이루었고 무엇을 성취했나 하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이 꽤 마음에 드는 상태이긴 하나 개인적인 변화나 나아감은 전혀 없다.

그때 이후 나를 발전시키기 위해 했던 노력은 전혀 없다는 거.

여전히 술을 많이 먹고 여전히 성취를 위한 열의라곤 없단 사실이 참으로 지긋지긋하다.

출판사 사장님을 뭐라 할 자격이 있겠나.

이러다 죽어버리면 억울해서 죽지 못할 거 같다.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상태라면. 인생은 너무 무의미하지 않은가.


찾아보길 잘했다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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