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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저달 Sep 08. 2019

헤어지는 기회

당분간! 느닷없는 금주선언


최근 가장 행복한 시간은 멜로가 체질을 보며 소시송을 안주삼아 맥주를 마시는 이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남겨진 일과 티비, 맥주 모두를 잡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천우희의 매력에 감탄을 거듭하다 얼핏 보니 굴러다니는 맥주캔을 가지고 놀고 있던 보슬이가 어느 순간 계속 다리를 핥아대고 있다. 나보다 더한 집중력으로. 왜지. 왜 그러는거지 하면서도 나의 시선은 재빠르게 다시 티비와 노트북 사이에서 분주하였다. 일과 드라마가 드디어 끝나고 문득 보슬이를 보니 입, 다리 그리고 이불이 피범벅이다. 금과옥조로 키우진 않았어도 꿈에서 보슬이를 잃어버리고 울며 찾아다닐 정도의 애정을 가진 나는 너무도 놀랄 수밖에. 은근 걱정 많고 보슬이 사랑이 굵직한 남편도 당장 병원을 가자고 하며 맥주캔을 마구 굴러다니게 한 나를 짧고 빠르게 비난한다. "엄마가 잘못했어"라는 말을 반복하며 피냄새 진동하는 보슬이를 꼭 껴안고 근처 24시간 동물병원에 가니 의사같이 생기지 않은 이상한 아저씨가 차트에 이름을 적으라고 준다. 보슬이는 쳐다도 안 보고 한참을 차트를 보며 컴퓨터에 옮겨적고(자그마치 10분을!) 대충 보슬이를 살펴본다. 심지어 나보고 이리저리 잡으라고 지시를 한다. 피냄새는 많이 나는데 이미 피는 나지 않는 상태라며 아마도 혀를 다치지 않았을까요. 라는 나도 할 법한 이야기를 하고는 느리게 항생제와 소염제 주사를 놓고 더더더 느리게 약을 짓고. 더더더더 느리게 정산을 해준다. 무려 83000이라는 도둑놈 같은 진료비도 화가 났지만 거의 삼사십분동안 아무것도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느리기만한 한 남자를 땀을 뻘뻘 흘리며 보다 남편과 나는 기진맥진하게 되었다.


유난스러운 과보호 부모처럼 보슬이를 응급실에 데리고 간 것은 실수였지만 이를 통해 나는 당분간 느닷없이 금주를 결심하게 되었다. 맥주캔을 굴러다니게 한 나를 자책하기엔 충분한 시간과 돈이 소요되었기 때문일까. 맥주값을 아껴 응급실비를 벌겠어 라고 남편에게 선언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일까.

실은 오랜시간 금주선언이 좌절되는 것이 부끄러워 금주선언조차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나의 전력 때문에 계기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계기를 이용해 냉큼 말해버렸다는 것. 그것의 힘에 기대고 싶다. 글쟁이가 되겠다고 호언장담한 김에 이까짓꺼는 못하겠냐 싶은 자포자기의 심정이기도 하다. 사실 글을 쓰는 것이 술을 끊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느껴진다.


나의 술에 대한 애증 역사가 깊다. 친구는 편지에서 "너의 그 끝없는 술에 대한 욕망이 정말 신기하다"라고 적을 만큼 대학에 술을 먹기 위해 들어간 사람처럼 전쟁하듯 마셨다. 술 알레르기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도 이겨내며 쟁취한 술은 친구이자, 추억 그 자체다.  긴 하루의 끝에서 마시는 한 잔은 나에게 주는 선물이였고 시간의 빈자리를 채워줄 때는 친구였으며 애인과의 한잔은 놀이공원보다 더 재밌는 데이트였고 남편과의 한잔은 의리였다. 그리고..친구들과 나눈 술은 여행 같았다. 어디에 가서도 이 사랑을 숨기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왜 자꾸 밀어내려고 다짐을 하는건가. 너무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신파조의 말이 이 순간 딱이다. 너무 사랑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치명적이다. 벗어나지 못하고 지배될 거 같은 두려움과 오래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선 거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기습적으로 이별을 선언해야 술을 좋아하는 백가지 이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술이 없는 나날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곳에 가보고 싶기도 하다. 그럼 당분간 술 대신 글로 긴긴 밤을 채워볼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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