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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저달 Sep 20. 2019

앗싸 아줌마로 산다고?

인싸 앗싸가 뭐길래

인싸, 앗싸.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아줌마는 어리둥절했다. 도무지 인싸란 어떤 사람을 칭하는 것인지도 알쏭달쏭했다. 인싸 까페, 인싸 여행상품, 인싸요리, 인싸되는 법.... 온통 인싸라는 말 투성이다. 인싸라는 말만 들어도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정확한 의미를 찾아보니 인싸란 '소속된 무리에서 적극적으로 어울려 지내는 사람'을 칭한다고 한다. 트렌드에 민감한 사람으로 바꾸어 사용할 수도 있는 듯하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인싸 열풍을 포모 증후군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다. 포모 증후군은 세상의 흐름에서 자신만 소외됐거나 고립됐다고 느끼는 공포감을 의미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리 작정하고 구분 짓고 인싸로 살기를 종용하는 것에 어깃장을 놓고 싶은 마음은 나만인가.


자라면서 남들과 같은 노선은 어쩐지 재미가 없었다. 차이를 위한 차이도 재미없는 건데 말이다. 중학교 때 소방차를 미워하고 정태춘을 들었다. 텔레비전도 보지 않았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같은 걸 이해도 못하면서 진지한 얼굴로 읽었다. 고등학교 때는 '태백산맥'을 읽으며 나만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보고 있는 줄 알았다. 짐짓 그런 척의 나날이였다. 대학에 가서는 나이트클럽에 농구화를 신고 갔다. 모래시계는 재미없다고 안 챙겨봤고 소개팅이 있으면 부러 멋을 안 부리고 나갔다. 털털에 목숨을 걸고 여성스러움에 진저리를 쳤다. 당연한 결과로 외로웠다.


아. 나같이 산 사람이 앗싸였군!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의식하지 않으려 의식하는 모습도 꽤나 꼴불견이긴 했다.  사실 '누구나'의 세상이 '나만'의 세상보다 안락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 만큼의 앗싸는 사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기에 '나만'에서 굳이 안 벗어나도 살 만했다. 그 와중에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집을 장만하고 아이를 낳는 이런 누구나 하는 일에서 열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누구나의 삶을 살고 있다. 이젠 인싸인 건가?




하지만 단지 그런 것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새롭게 숙제 같은 관계는 계속된다 . 인싸 안에 또 인싸 앗싸가 숙명처럼 존재한다. 또 그 안에 인싸 앗싸가 있고..끝이 없다. 무한 인싸앗싸의 세계에 빠진 건가.


아이로 인해 생성되는 학부모모임이 덜그덕덜그덕 소화가 안된다. 학부모 모임을 가기 위해서는 얌전한 옷을 입어야 한다. 자칫 화려하거나 추레하면 바로 욕이 펼쳐진다. 담배를 피워도 욕을 먹고 청소를 안하고 지저분해도 이혼을 해도 유난히 아이자랑을 해도 앞장서서 아이 욕을 해도 매번 똑같은 옷을 입고 공개수업을 가도 성형수술을 해도 명품백 하나 없어도 욕을 먹는다. 공부를 너무 시켜도 너무 안시켜도 안된다. 욕을 먹을 수 있는 다양한 포인트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으니 그냥 욕을 먹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욕의 도가니에 매년 투입된다. 이 세계는 욕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때 다른 학부모를 사귀어두지 않으면 6년이 힘들다는 둥의  불안감조성의 말로 초조하게 무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한다.  이런, 어디서 들어본 말이다 했더니 절친은 중고등학교때 만들어야 한다던 때랑 똑같잖아.  그런 정설 아닌 정설로 몰아가는 거에 대한 알러지가 있다. 어디든 무리지으려는 속성을 숨기지 않고 자신이 인싸가 되기 위해 누군가를 앗싸로 만드는 사람은 무섭다.

물론 아닌 사람도 어딘가 존재하겠지나는 아니다. 욕을 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왔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인 양.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 덕분에 좋은 관계를 얻는 행운도 많았만 아닌 대부분은 이런 일들을 지속하며 힘에 부쳤고  어느덧 튕겨져 나왔다.   불편함과 불이익이 따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의든 타의든 지금 상태가 나쁘지 않다. 무리에서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것은 포기했다.


시 앗싸다. 




'필경사 바틀비'를 읽으면 숨이 턱턱 막힌다. 처음에는 바틀비를 보며 저런 제멋대로 기존질서를 파괴하고 말이 안통하는 인간이 있나 싶었다.  다시 읽으면 관용을 베푸는 척하는 변호사의 이면이 눈에 들어오고 그와 같은 일반인들이 자기와 다른 이를 대할 때 보이는 폭력적인 태도가 섬찟하다.  허술한 관용으로 자신의 죄책감을 벗어나려하는 자의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비참함에 대한 생각이나 비참한 광경은 어느 선까지는 우리에게 가장 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몇몇 특별한 경우 그 선을 넘어서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동시에 끔찍한 진실이다'


알량한 동정심이 효과적인 구제로 이어지지 않자 죄책감마저 사라진다. 알고보면 명백한 피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변호사는 견디지 못하고  그를 몰아내는 데 골몰한다. 바틀비는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상태를 택함으로 자신의 택할 수 있는 권리를 시종일관 조용히 이야기하지만 일반적이라 일컫는 세상의 상식을 가진 이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일 뿐이다. 이 책은 '상식'과 '차이'에 대한 극단적 물음을 하고 있다. 바틀비는 굳이 말하지면 앗싸의 최고봉이다.  역시 항상 일반적 상식의 울타리 안에서 움직였다. 상식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지 않았음에도 눈살을 찌뿌리기 일쑤였다. 인싸의 거침을 가졌다.

앗싸라고 음지에 있는 척 하더니 무한 인싸앗싸 반복시스템 중 '다름'이 불편하지 않은 경계에서 앗싸라고 주장한 꼴이다. 포기한 것은 어울림이지 안정감은 아니다. 앗싸 아줌마로 살고 있다는 말이 머쓱하다. 


사실 앗싸인싸 같은 선긋기는 당장 때려쳐야 할 나쁜 말이다. 쏠림을 인정하고 다름을 뭉갠다.  다름에 대하여 녹신녹신하게 반응하는 것을 차단한다.


나는 앗싸도 인싸도 아니고 그냥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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