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성호 Jan 11. 2020

희귀병이라는 로또에 당첨되다

희귀난치성질환 투병일기 (1)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절대 나에게는 벌어나지 않을 법한 일이 농담처럼 일어났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2학년 여름방학, 4박 5일간의 봉사활동을 다녀온 날부터였다. 몸이 굉장히 피로한 상태에서 비도 퍼부어서 바지가 다 젖었었다. 그날 밤부터 열이 심하게 났다. 평소 같으면 해열제를 먹으면 며칠 내로 열이 떨어졌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처럼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진 않았지만, 일주일 째 열이 떨어지지 않으니 어머니가 걱정을 하셨다. 혹시 모르니 주말 동안만 잠시 대학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 나는 '이런 걸로 입원을 왜 하는거야?'라고 불평하면서 입원했다.


응급실에 가자 마자 온갖 검사가 이뤄졌고, 이어서 해열제가 혈액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러고는 하루 만에 열이 다 내렸다. 열이 나는 동안은 조금 어지럽기도 했었지만 열이 떨어지니 정신도 맑아졌다. 이보다 건강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역시 괜히 입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날 월요일에 당장 퇴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날, 월요일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날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보통 입원을 하면 매일 아침 일찍부터 피검사를 한다. 나는 이미 내가 다 나았고 오늘 퇴원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벽부터 병실로 와서 불을 켜고 피를 뽑기 위해 소매를 걷는 것을 다소 귀찮게 여기고 있었다. '피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침 일찍 피를 뽑아가면 보통 점심 먹기 전에 피검사 결과가 나온다. 나는 빨리 피검사 결과와 함께 이제 퇴원해도 된다는 의사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피검사 결과는 안 알려주고 갑자기 다른 검사를 추가로 하라고 했다. 그 검사가 ‘골수검사’였다.


골수검사는 다소 까다로운 검사이다. 일반 피검사와 다르게 엉덩이에 있는 골반 뼈에 주삿바늘을 찔러야 한다. 뼈는 단단하기 때문에 속이 꽉 차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뼈의 바깥쪽은 단단하지만 뼈 안에는 구멍이 슝슝 나 있는 '골수'라는 곳이 있다. 골수는 적혈구나 백혈구처럼 피의 성분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다른 말로는 '조혈모세포'라고도 부른다. 이날 나의 골수세포를 검사하자고 한 것이다.


곧 퇴원하려고 하던 중에 난데없이 골수검사를 하자니 좀 황당했다. 어머니가 간호사에게 물어보러 갔다. 나는 혼자 병실에서 기다렸는데, 꽤 오래 걸렸다. 어머니는 약간 심각한 표정을 하고 돌아왔다. 오늘 아침 피검사 결과가 갑자기 이상하게 나왔고 의심되는 질병이 있으니 추가 검사를 하기는 해야겠다는 것이다.


골수검사는 뼛속에 주사를 찔러야 하기 때문에 피가 많이 난다. 지혈을 몇 시간 동안 해줘야 한다. 나는 한쪽 골반 밑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놓고 5시간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있어야 했다. ‘설마..’ 하는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를 기다렸다.







다음날 믿기지 않는 진단 결과를 받았다. 병명은 ‘혈구탐식성 조직구증가증’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와서 한참 동안 뭐라뭐라고 설명해 주고 갔다. 소위 희귀병이라 불리는 병이었다. 나만 어리둥절한 것이 아니었다. 의사들도 해당 전문과가 아니면 생소한 질병이었다. 부모님은 이상한 이름을 가진 질병이 뭔지 찾아보기 위해 해외 논문을 뒤졌다.


한편, 나는 전날 골수검사에 이어서 오늘은 뇌척수액 검사를 받아야 했다. 이 병이 뇌로도 전이가 됐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뇌척수액 검사는 등을 둥그렇게 만 불편한 자세를 하고 척수에다가 주삿바늘을 찔러야 한다. 이틀 연속으로 교과서에서만 보던 검사를 받으니까 속이 울렁거렸다. 이날도 지혈을 위해 척수에 모래주머니를 깔고 하루 종일 가만히 누워있어야 했다.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대단히 큰 일이 나에게 벌어지긴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납득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이제껏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내 의지대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라고 배워왔던 것 같은데, 이런 일이 닥쳐 보니 내가 배운 모든 것이 다 가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뇌척수액 검사도 빠르게 바로 다음날 나왔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뇌로는 전이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도 병이 초기에 진단이 되었다. 이게 다행인 이유는 대부분 혈구탐식성 조직구증가증은 다른 과에서는 진단이 힘들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이 병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병이었다. 내과 중에서도 혈액내과 의사가 아니면 잘 모른다. 열이 나니까 감염내과에서 한참 헤매다가 병이 많이 진전된 후에 겨우 혈액내과를 찾아와서 진단을 받는단다. 실제로 나를 진단한 의사 선생님은 내가 두 번째 환자였다고 한다.


혈구탐식성 조직구증가증은 일종의 자가면역 질환이다. 90년대 말에 처음으로 병이 밝혀졌다. 그 이전에는 원인불명으로 죽는 병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모르는게 많다. 치료법은 제한적이다. 치사율이 상당히 높아서 환자의 반 이상이 죽는 병이다. 치료하지 않으면 보통 두 달 내에 사망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이 병은 80만 명 중 1명에게 발생한다고 한다. 연간 62~63명 정도가 발병한다. 백혈병보다 희귀한 질병이다. 나는 희귀병이라는 로또에 당첨된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의대생일 때 가졌던 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