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난치성질환 투병일기 (2)
다음날부터 바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암 환자들에게 투약되는 항암제가 내 몸에 스며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병원으로 항암제를 맞으러 가야 했다. 항암제를 맞고 집에 돌아 오면 뱃속의 모든 장기가 일시적으로 정지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내 몸에 있는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내 몸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뱃속에 뭔가 무겁게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소화도 잘 안되고 늘 더부룩했다.
내가 맞았던 항암제는 암 환자들이 맞는 약에 비하면 훨씬 약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불편하다니, 항암제를 맞아야 하는 암 환자들의 고통은 얼마나 클까.
의사 선생님은 내 병이 치료 가능하다고 했다. 정해진 프로토콜대로 12주간의 치료를 먼저 시작하겠다고 했다. 이때까지 나는 이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몇 달만 버티면 완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12주간의 치료 후에도 증상이 낫기는커녕, 병이 계속 악화되었다.
혈구탐식성조직구증가증이라는 병의 지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페리틴(ferritin)'이라는 수치이다. 일반인의 페리틴 수치는 50 정도가 된다. 그런데 내 병은 특징적으로 페리틴 수치가 정상 수치의 10배~100배 이상까지 올라간다. 나는 처음 입원했을 때 200 정도였다가, 12주가 지난 후에는 1000을 넘어섰다. 얼마 후에는 3000을 넘겨 버렸다. 내가 처음 입원한 대학병원에서는 페리틴 수치가 몇 천 이상이 되면 측정이 불가능해진다. 나중에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나서 페리틴 수치를 다시 쟀을 때 무려 10,000을 넘겼다고 했다. 페리틴 수치와 함께, 내 질병도 불길이 일듯이 번진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12주 치료'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다고 했다. 처음에 딱 3달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었기 때문에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걸 다시 처음부터 해야한다는 말을 들으니 미칠 것 같았다. 통원치료를 하다가 언젠가부터는 다시 입원해서 아예 드러눕게 되었다.
몇 가지 치료가 계속 실패했다. 특히 그중에서 '스테로이드 펄스 테라피'가 있었다. 스테로이드 충격 요법, 혹은 스테로이드 초고용량 치료법이라고도 한다. 스테로이드라는 약물은 원래도 굉장히 독한 약이다. 운동 선수가 먹는 스테로이드랑은 좀 다르다. 목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말도 제대로 못할 때 하얀색 스테로이드 알약 1~2개만 먹어주면 거짓말처럼 싹 낫게 해준다.
보통 알약 하나의 용량이 0.75mg 정도 된다. 7.5mg 이하를 투여하면 저용량, 30mg 이하면 중등용량, 100mg 이하면 고용량, 100mg 이상이면 초고용량이라고 한다.
그런데 스테로이드 펄스 테라피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높은 용량인 1,000mg을 매일, 3일 동안 투여한다. 스테로이드 알약 하나가 권총이라면 중등용량은 대포에, 고용량은 미사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테로이드 펄스 테라피는 핵폭탄 투하에 가깝다. 초고용량 스테로이드로 몸에 핵폭탄을 투여하여, 교란된 면역 체계에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이다.
펄스 테라피를 받고부터는 몸이 망가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때쯤부터 정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모두 적으려면 두꺼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펄스 테라피도 효과가 없었다. 병은 계속해서 활활 타오르기만 했다. 결국 (부모님의) 고민 끝에 이 질병을 치료해본 경험이 더 많은 의사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전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즈음이 되었을 때는 사실 거의 제정신을 차리고 있기 힘들었다.
입원이 장기화 되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었다. 병원에 오래 있으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고, 잠을 너무 못자거나 혹은 잠을 너무 많이 자게 되면서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들어졌던 것 같다. 이전까지는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프면 아플수록 굳게 마음을 먹고 희망을 가져야 병이 더 나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정신이 나약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 항상 웃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몸이 아프고 고통스러우면 정신도 자연스레 정신도 약해지게 된다.
나에게 어떻게 그 힘든 시간을 버텼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극심한 고통을 겪어낸 정신력이 대단하다는 말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병이 다 낫고 난 다음의 일이다. 한창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나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희망을 갖고 버틴 것도 아니었다. 희망을 갖는 것조차 사치에 불과했다.
완벽하게 모든 의지를 내려놓았다. 나의 몸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간병을 하는 부모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밥이 나오면 억지로 먹고, 자라고 하면 자고, 피검사를 하라고 하면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 상황을 버틸 수가 없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내가 무엇을 겪었는지 복기해볼 수 있었다.
어쩌면 처음에 '12주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치료가 길어질수록 더 힘들어졌던 것 같다. 당시 나는 큰 고생을 해본 적 없이 자란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다. 내가 인내할 수 있는 고통의 크기는 고작 12주였던 것이다.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은 나에게는 죽음과도 같게 느껴졌다.
모든 과정을 다 겪어내고, 회복 기간을 갖고 난 후에서야 나는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강인한 정신력을 가져서 회복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나약하고 부숴지기 쉬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의 시간이 모두 지나간 후에, 그 시간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따라서 내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원망하고 분노하고 부정했다. 하지만 점차 내가 왜 그런 일을 겪게 되었는지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경험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해 겨울, 결국 골수이식을 받았다. 골수이식은 이 병에 있어서는 거의 유일하고 확실한 치료법이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공여자가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군지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기꺼이 자신의 조혈모세포(골수)를 기증해준 누군가에 의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조혈모세포 기증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기적이다.
골수이식은 다행히 거부반응 없이 잘 되었다. 옆 병실의 환자는 골수이식을 나보다 먼저 이식을 받았는데 생착에 실패해서 두 번째 골수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그 환자는 안타깝게도 살지 못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누가 살아서 나오고 누가 그렇지 못할지는 정말로 인간이 정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종교가 없고 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분명 나의 의지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골수이식 직후 매일 아침마다 간호사가 백혈구 수치를 수첩에 적어주었다. 나에게 백혈구 수치는 생명의 지표였다. 나의 백혈구 수치는 1주일 넘게 0이었다. 언제든 아주 작은 세균 감염으로도 죽을 수도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30이 되었다. 0과 30은 정말 무한히 다른 숫자였다. 편평한 땅에서 조그만 새싹이 올라오는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더디게 더디게 숫자가 늘어서 100이 되고, 또 얼마 지나 300이 되었다. 이때부터는 쑥쑥 증가했다. 완전히 정상 수치가 되기까지는 약 1년이 걸린 것 같다.
누군가의 몸에서 나온 골수세포의 일부가 내 몸에 들어와 혈액을 떠돌다가, 뼛속에 있는 골수에 생착하고, 열심히 만들어 낸 혈액 세포가 다시 혈액을 돌면서 내 몸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보다 어떻게 더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