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성호 Jan 12. 2020

다시 삶 속으로 돌아오기까지

희귀난치성질환 투병일기 (3) 골수이식부터 일생생활로 돌아가는 과정.

2012년 1월, 혈액 수치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때 내 몸은 만신창이였다. 침대에 누워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간신히 낑낑대면서 옆으로 돌아눕는 것이 전부였다.


이 정도로 몸에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고용량 스테로이드 치료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테로이드 치료를 받던 어느 날 허리를 살짝 삐끗하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눕게 되었고, 이날 이후로 점점 더 심해지더니 결국은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본래 질병은 자가면역질환이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다친 것도 아니지만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인해 척추에 압박 골절이 생긴 것이다. 스테로이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뼈를 녹여버린다. 2012년 1월 즈음에는 척추 근처에 알 수 없는 덩어리 같은 것이 보인다고 했다. 당시에 원인을 모르는 떨어지지 않는 고열 때문에도 엄청나게 애를 먹었는데, 이 정체불명의 덩어리 때문이 아닌가 하여 조직검사를 하자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이 덩어리는 척추 근처에 있어서 조직검사를 하는 것 위험하다고 했다.


정체를 알려면 검사를 해야 하는데 검사 자체가 위험하다니.. 질병이라는 것은 정말 미로 같다. 하나를 알면 두 가지를 더 모르게 된다. 온통 물음표 투성이인 상태로 한참을 지내고 나서, 역시 물음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치료가 끝나고 몸은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나중에 정체불명의 덩어리는 사라졌다.








처음에는 압박 골절 때문에 허리를 쓸 수 없었고 스테로이드가 어디까지 내 척추를 녹여버릴지 알 수도 없었다. 그냥 대책 없이 무방비로 요행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느 정도 수준에서 멈춘 것 같다. 압박 골절이 있긴 하지만 따로 치료를 더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약간의 골절이 있는 상태로 굳은 듯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겨우 돌아누울 수 있는 수준에서 조금 더 나아져서, 이제는 점점 팔의 반동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옆으로 돌아누운 상태에서 한쪽 팔을 살짝 튕겨 주면 그 반동으로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이제 침대에 혼자 앉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워커'라고 부르는 보조기를 잡고 몸에 힘을 주어 간신히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골수이식을 받기 전에 드러누웠을 때부터 몇 달이 지나서 처음으로 내 두 다리로 버티고 선 것이다. 이것조차 감격이었다. 살짝씩 살짝씩 다리에 힘을 주면서 기어가듯 걸어 화장실까지 갈 수 있었다.


며칠 후에는 워커를 잡고 병실 문을 나서 보았다. 이때는 마스크를 끼고 나름대로 중무장(?)을 했다. 아직 면역 체계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감염에 극도로 예민해서였다. 작은 감염도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한동안 복도를 천천히 걸어다니는 연습을 했다. 그때 창밖으로 하얗게 얼어붙은 한강이 보였다.


그때 생각했다. ‘정말 나도 다시 저 밖을 돌아다닐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너무나 아득해 보였다.








2012년 2월 14일에 퇴원을 했다. 처음 병명을 들었을 때 얼떨떨했던 것처럼, 드디어 퇴원을 했을 때도 얼떨떨했다. 이제 정말 살아난 건가, 정말로 힘든 시기가 지나간 게 맞나, 싶기도 했다.


그 후로도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몇 년이 더 걸렸다. 워커 없이도 걷게 되기까지가 한 달이 걸리고, 계단을 쉽게 오르내릴 수 있게 되기까지가 또 한 달이 걸렸다. 일반적인 사람의 정상 속도로 걸을 수 있기까지 또 몇 달이 더 걸렸다.


이렇게 만 2년을 휴학했다. 2년이 지나고 나서 겨우 복학을 했지만, 의대 생활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만큼의 건강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또 1년을 유급을 했다.


'이제 정말 다 나았구나!' 라고 생각했을 때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으로 또 한 번 좌절해야 했다. 고관절 무혈성 괴사가 온 것이다. 환자한테는 무혈성 괴사라는 것이 너무나 무서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의사선생님은 '외과 가셔서 수술하셔야겠네요..'라고 남의 일처럼 말했다.


나를 치료해준 의사선생님은 혈액내과 전공이고, 외과적 수술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혈액내과적 관점에서 내 병을 제대로 치료하면 의사선생님은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나의 건강과 질병은 전공과목별로 쪼개질 수 없는 것이지만, 의학은 전공별로 경계가 매우 뚜렷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를 담당해준 의사선생님은 내 목숨을 살려주신 생명의 은인이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사망했을지도 모른다. 중간에 포기할 수 있었을 텐데도, 단지 의사라는 이유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를 살려냈다. 물론 의사선생님들뿐만 아니라 24시간 언제든 호출하면 달려오는 간호사선생님, 각종 검사를 해주시는 분들과 안 보이는 곳에서 병의 치료를 위해 역할을 해주시는 모든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분들께 무한히, 무조건적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2015년, 고관절의 무혈성 괴사를 치료하기 위해 마지막 수술을 했다. 그리고 재활 기간을 거쳐, 2016년부터는 정말로 다 나았다. 내 과거를 모르고 그냥 나를 봤을 때는 내가 아팠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운동도 하기 시작하고, 공부도 다시 시작하고, 모든 것이 점점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군대에 재검 신청을 하러 갔다. 들고 가야 할 병원 차트가 한 묶음이었다. 두꺼운 전공 서적 3~4권 분량은 되었던 것 같다. 잠깐 차트를 둘러보더니 바로 면제 판정을 받았다. 눈물이 왜 나오는지 이유를 알기 전에 먼저 눈물이 핑 돌았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병원 차트가 20대 초중반의 내 인생의 일기장이었다. 나는 따로 일기를 쓰지 않았지만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거기에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슬픔, 안도, 감격, 먹먹함, 억울함 등 온갖 감정이 복합적으로 밀려들어왔다. 그 감정들이 뒤섞여서 한 방울의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이제는 환자의 삶을 끝내고 다시 삶 속으로 돌아와야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