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번의 효능

무의미하기에 의미있는 숫자

by 일상의효능

살다 보면 신분이나 소속 증명을 위해 부여받는 숫자들이 있다. 평생 사용하는 주민등록번호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번호들은 내 신상에 따라 효력의 기한이 정해져 있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잊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용도가 10년 이상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억에 남는 숫자가 있다.



09-**05180



군번이다. 전역한지 벌써 10년 넘게 지났고 사실상 2년 밖에 쓰지 않은 번호인데도 이상하게 안 잊혔다. 나만 그런가 궁금했는데 이젠 군대 이야기에는 별 흥미도 느끼지 않기도 하고 또 군번을 기억하는지의 대화를 할 일도 없어서 그냥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냥 넘기곤 했다.



그러다 어제 설거지를 하면서 침착맨과 주호민이 함께한 군대보급품월드컵 영상을 봤다. 예전에 한 번 시청했는데, 그때 생각보다 싱거워서 끝까지 다 안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엔 설거지하느라 끝까지 봤는데 마지막쯤에 침착맨과 주호민이 군번을 외우는 부분이 있었다. 그걸 듣고 나도 외우고 있었는데, 시청자들 역시 본인 군번이 기억났는지 채팅창에 적기 시작했다.

07-*****, 13-****, 11-****, 20-**** ...

군번은 맨 앞 두 자리가 입대 연도이기에 채팅창에서 시청자들의 다양한 연령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난 그 군번을 쓴 채팅을 보고 '다들 나처럼 기억하는구나!' 생각했고 이상하게 찡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주호민이 채팅창을 보더니 이렇게 이야기했다.



"군번 올라오는 거 되게 찡하다. 고생했구먼 다들~"



이 말이 내 감정의 적확한 표현이었다. 다들 어느 때 어딘가에서 나처럼 고생했겠구나 싶은 마음이랄까?


보통 온라인에서 특정 군번 기준으로 '나 때는 어땠는데~' 얘기가 시작되면 늘 그 위의 군번이 나타나 그들을 무시하고, 그러면 또 그 위의 군번들이 나타나는 식의 패턴이어서 눈살 찌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라는 공통의 경험이 있지만 세밀하게 보면 다녀온 시기도, 군 종류도, 부대도, 보직도, 문화도 다 다르기에 군대 이야기는 한편으로 늘 싸움으로 번지기 쉬운 주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맥락에서 이 군번 적은 채팅도 각각 입대 연도가 보여 무시의 분위기로 갈 수도 있었는데, 왜 전우 같은 느낌이 들었을까?

오랜 시간 지났는데도 그 무의미한 숫자를 다들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바칠 수 밖에 없었던 서로의 젊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것에 대한 공동의 추억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무의미하면서도 의미있는 숫자. 그게 군번의 효능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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