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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리어스 Sep 07. 2022

부재를 포용하는 건축에 대하여

Embracing the Absence_01  

말끔한 외관을 한 병원 한편의 장례식장, 이곳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창문도 없는 빈소에서, 망자의 사진을 앞에 두고 작별을 고하는 장례의식은 대개, 죽음으로 인한 부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짧은 시간 동안 치러집니다. 병원 장례식장의 경우를 제외하면, 2022년 서울, 이 도시의 일상에서 ‘죽음'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이 오직 ‘삶'에 관한 것으로만 꽉 차있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매일같이 맞닥뜨리는 피트니스클럽 전단지나 성형외과 광고물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들은 다름 아닌, 질병과 노화에 대한 극렬한 불쾌감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마치,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죽음이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심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죽음을 가능한 한 먼 곳에 두려고 하는 것은, 죽음이 자아내는 불쾌하고 거추장스러운 감정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지는 보통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에 격리되어 있어서, 자주 찾아가서 추모의 기회를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장묘시설은 혐오시설이라는 낙인이 찍힌 지 오래이기에, 지금에 와서 도시 안으로 불러들이고 싶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요.


이 사회에 만연한 죽음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감정,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유의 빈곤은 죽음을 담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성찰의 부족해지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장례식장과 공동묘지에서 느꼈던 장묘 건축의 ‘가난한' 속성은 결국 우리 사회에 결여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는, “죽음은 오로지 산 자의 문제이다. 죽은 자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죽음이 살아있는 자의 문제라면, 결국 장묘 건축은 우리들을 위한 장소이니 언제까지나 관심 밖의 영역에 방치해 둘 수는 없지 않을까요. 죽음을 다시 일상의 자연스러운 영역으로 복귀시키는 것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적 · 공간적 공백(Void)을 확보하는 것은, 남겨진 자들이 그들에게 허락된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어지는 글들에서는, 유럽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장묘 건축의 사례를 탐방하고 각각의 장소에 담겨있는 공간적 특성과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죽음으로 인한 부재와 상실에서 파생되는 고통과 슬픔을 장묘 건축 공간에서 어떻게 감싸 안아야 할지 질문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장묘 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영감을 얻기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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