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들은 영영 이해할 수 없겠지만
학교다닐 때, 소설의 시점은 이야기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네가지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 1인칭 주인공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우리의 삶은 영영 1인칭 관찰자나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신처럼 모든 걸 알고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글을 읽으면 '아 이 캐릭터가 이래서 이랬고 저래서 저랬겠구나' 를 이해할 수 있어서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듯이 시원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계속 서술되면서, 저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었습니다. 그중 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소설은 제가 읽은 중 최고라고 말하고 싶은 글이고 너무 좋아서 매우 여러가지로 읽혀질 가능성이 있지만 저는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자신도 없고 그럴 깜냥도 되지 않으니 오직 이 파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파트인 '이해되지 아니한 단어들'입니다.
먼저,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 글은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이 네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주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중, '이해되지 아니한 단어들'에서는 연인관계를 이어오던 '사비나'와 '프란츠'가 어긋나게 된 이유에 대해 이 둘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영영 이해할 수 없을 단어를 통해 설명합니다. 다음은 소설 속 문장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충실과 배반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시신을 따라 공동묘지로 갔던 순간까지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는 또한 회상 속에서도 어머니를 사랑했따.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충실이 모든 덕목에서 최고일 것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충실은 우리들 삶에 하나의 통일성을 부여한다. 충실이 없을 때 우리의 삶은 수천의 순간적 인상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종종 그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어쩌면 무의식적 타산에서 그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자기가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이 사비나의 마음을 매료시킬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녀를 자기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사비나를 매혹시킨 것이 충실이 아니라 배반임을 알지 못했다. <충실>이란 말은 그녀로 하여금 그녀 아버지를 회상시켰다. 소도시의 청교도였던 그의 일요일 취미는 해지는 숲의 모습과 화병에 꽂은 장미꽃다발을 그리는 것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그녀는 벌써 아이 때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었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동갑내기의 소년에게 반했따. 그녀의 아버지는 걱정이 되어 1년 내내 그녀가 혼자 외출하는 것을 금금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그녀에게 피카소의 복사물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것들을 웃음거리로 보고 재미있어 했다. 자기 동급반 소년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적어도 피카소의 이 입체파 그림을 사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녀는 이젠 드디어 자기 집을 배반할 수 있다는 즐거운 기분으로 프라하로 갔다.
배반. 그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혐오스런 것이라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선생님으로부터 들어왔다. 그런데 배반이란 무엇일까? 배반은 대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배반은 대열에서 이탈하여 미지를 향해 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비나는 미지를 향해 출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미술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녀는 피카소처럼 그려서는 안 되었다. 그때는 의무적으로 소위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충실해야 했고 초, 중, 고등학교에서는 공산주의 정치가들의 초상화를 그렸던 시기였다. 아버지를 배반하려는 그녀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외냐하면 공산주의는 다른 아버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사랑을 금했고(당시는 청교도적인 시기였다) 피카소를 금한 아버지와 똑같이 엄했고편협했다. 그녀는 어느 프라하 극단의 형편없는 배우와 결혼했다. 그것은 그가 행패부리는 사람으로 소문나 있어 그녀의 두 아버지에게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하루 뒤에 그녀는 전보를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슬픈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아버지가 장미꽃다발이 꽂힌 화병을 그렸고 피카소를 싫어한 것이 그토록 나빴단 말인가? 열네살 먹은 자기 딸이 임신하여 집에 오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했던 것이 그토록 비난스런 것인가? 그가 부인 없이 살 수 없었다는 것이 그토록 우스꽝스러운가?
다시금 배반에 대한 욕구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남편에게(남편에서 그녀는 더 이상 행패꾼을 볼 수 없었고 다만 성가신 술주정뱅이를 보았다) 자기가 그를 떠날 것이라고 통보했다.
B를 위해 A를 배반했던 사람이 B를 배반한다고 할때 그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써 A와 화해했음을 반드시 일컫는 것은 아니다. 이혼한 이 여류화가의 삶은 배반당한 그녀 양친의 삶과 같지 않았다. 최초의 배반은 보상될 수가 없다. 그것은 일종의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각 배반은 우리를 원조배반의 시발점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지게 한다.
정말 이해하고 싶거나,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정말 알고 싶어 합니다. 정말로 이해하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는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는 게 좀 놀랍지만, 관계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가 닿는 것에서 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고 싶어합니다. 관계를 시작하거나 혹은 풀어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상대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배운 것은 사실 단념입니다. 한 사람의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지 않고서야 다른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순간 마음을 모두 바치는 연인에 대해서도 알 거고 이해하고 마음이 온전히 가 닿기 어려운 것인데, 실제로 우리가 평생 만나는 수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모두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겠지요.
우리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영영 묻지 않고, 궁금해 하지도 않은 채로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이해하지 못한 채로 물결처럼 흘러보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개인이 만들어 온 역사가 서로 달라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흘러보내게 되는 일이 참 자연스러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각자의 결을 가지고 있고, 영원히 이해받지 못하고 스쳐지나가더라도 그게 참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넘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지적 작가 관점을 가지는 신이 아니기에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으며 각자가 가진 결이 맞부딪히는 것이 내가 살아간다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영영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아픈 순간이 오더라도 괜찮다고 이 모든 일들이 그럴 수도 있는 거라는 생각과 함께.
소설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1인칭 주인공과 1인칭 관찰자 시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죄로 다른 사람의 어떤 점에 대해서는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기 생겨나고 상황을 해석하고 서로에게 질문하고 궁금해 하는 거겠습니다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행동들이 어떤 결론을 내지 못하고 맴돌다 사라지더라도 괜찮다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에 닿지 못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온다면, 저는 다시 이 글을 읽을 것 같습니다.
‘살면서 어떤 것들은 영영 이해할 수 없겠지만 괜찮아요. 괜찮을 거에요.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어떤 일들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처럼 그럴 수 밖에, 그럴수 밖에 없다면서 되풀이 되고, 어떤 일들은 영영 가 닿지 못하고 마음 속을 맴돌아도 그 모든 것이 그럴 수 있습니다.’라고 글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