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시절,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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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하며 고통받았는데 재미있는 일들이 늘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어서 어린 시절 이후로 발길을 끊었다가 다시 다니기 시작한 성당이 마음의 위안이 되었고, 다시금 잡은 펜이 내 삶의 즐거움으로 변했다. 그리고 새롭게 친해진 동기생들과 아예 처음부터 시작한 탁구까지.
생각해 보면 핸드폰이 없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일들이었다. 핸드폰이 없으니까 평소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일들에 도전할 수 있었고, 또 다른 재미있는 일을 찾아 다양한 것들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주위 동기들과 소통할 일이 늘었고, 혼자서는 보내기 괴로운 길고 지루한 시간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핸드폰을 없애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핸드폰이 생긴 이후의 생활관은 정말이지... 평화로웠다. 내가 당직사관으로 들어갈 때쯤 이미 핸드폰 정책은 완전히 안착되었고, 모두 핸드폰이 있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갔다. 다들 시끌벅적하게 생활관 생활을 즐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서로 과도한 터치를 하지도 않는 평범한 삶. 마치 아파트에 사는 것처럼 내 이웃이 누구더라, 잘은 모르지만 가끔 지나가며 얼굴 마주하는 삶. 핸드폰이 그들에게 주어졌을 뿐인데 그간 존재했던 생활관의 악폐습이 모두 사라질 줄이야. 병영생활 2.0, 모두 서로를 괴롭히지 말고 건전한 병영생활을 해야 한다. 백 번의 말보다 서로에게 관심을 끊을 수 있는 한 번의 계기가 있으니 해결되었다. 물론 내가 예전에 느꼈던 그 즐거움은 이제 알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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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생활이 정리가 되었을 때 노트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그날의 일기보다는 소설을, 솔직히 그날 했던 일들에 대해 정리할만한 것들도 없었다. 매일 출근하면 똑같은 장소, 똑같은 업무, 특히나 병사들은 공구 챙기고 정리하는 일밖에 없었으니 말 그대로 대단치 않은 루틴의 반복이었고.(그래도 군생활을 하면서 확실히 배운 건 아이스커피 타는 방법이었다. 아이스커피만 3년 넘게 탔는데 요즘에도 커피 타오라고 시키나 모르겠다.)
처음 쓰기 시작한 소설은 당시에 유행했던 라이트노벨 스타일의 판타지였다. 어반판타지 장르의 초능력물, 내 기억에는 서브컬처 장르에서 이 유행이 끝물이었고 이젠 학원, 웹소설로 치자면 아카데미 배경의 스토리와 클리셰 비틀기 형식의 장르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유행이 끝나고서야 그런 형식의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웹소설 연재 플랫폼이 문피아, 조아라정도밖에 없었고 애초에 군인 신분이었기에 어디에서 연재하려는 심산으로 쓴 것은 아니었다. 그냥 시간 죽이기로 소설 쓰기만큼 적당한 게 없어서.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에는 아예 장르를 선회해서 예전에 하던 TRPG 배경을 가져와 쓴 정통 판타지, 순문학, 그리고 수필까지 꽤 다양한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글은 정통 판타지였다. 지금도 블로그에 숨겨놓은 글로 보관하고 있는데, 습작이 많지 않았다 보니 다시 읽어보면 좋은 글은 아니지만 당시 내가 어떤 문장을 추구했는지 눈에 보이는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시에 탐미주의적인 문장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었고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고 싶었다. 그건 내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봐왔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현실이 너무 비참했기에 오히려 아름다운 것을 추구했다고 생각한다. 꿈에서는 나비를 보고 싶으니까. 그래서 맞지도 않는 옷을 입기 위해 낑낑거렸고 당시에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쓰고는 했다.
지금은 어떤가? 라고 하면 나는 지금도 아름다운 문장을 좋아하고 가능하다면 그런 문장을 쓰고 싶어 하는 탐미주의자에 가깝다. 하지만 그게 내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덤덤하고 담백한 인간이다. 아름다운 것을 떠올리지만 누구보다 담백하고 덤덤하게, 올곧게 휘두르는 칼날처럼 연필을 뻗는 사람이다. 내가 다시 그 소설을 쓴다면 어떤 느낌의 소설이 완성될까. 아마 처음 썼던 글과는 전혀 다른 글이 완성되리라 생각한다. 언젠가 그 소설만큼은 다시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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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은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아버지가 성당을 다니면서 아들들을 같이 데리고 다니셨으니 나도 열심히 성당을 다녔고, 기도도 활동도 꽤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복사 생활도 꽤 길게 했고 끝내는 견진성사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물론 아버지가 성당 다니는 걸 그만두시면서 나도 같이 성당을 다니지 않게 되었지만.
일병 4호봉이 된 후 몇 년 만에 군 성당에 들르면서 오랜 방황을 끊었다. 사실 성당에 간 이후도 당시 군생활이 힘들어서였다. 너무 괴로워서 주말만큼은 정신적으로 쉬고 싶어서. 잠깐이라도 기도하면서 내면의 평화를 찾고 싶어서. 종교는 나약한 사람들의 도피처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정말로 힘드니까 종교라도 믿게 되고 거기에서 평화를 찾게 된다. 그래서 그게 나쁜 건가. 나는 그때부터 종교를 피난처로 삼았고 지난했던 군생활을 종교의 힘으로 버텼다.
사실 온전한 종교의 힘은 아니었다. 오히려 커뮤니티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군생활이 더 즐거워졌다. 친절한 군종병들과 정말 오랜 시간 함께한 같은 근무지의 선배, 우연히 신실했던 동기생과 다른 특기의 즐거운 사람들까지. 성당은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인데 힘든 일상 속 모두의 피난처가 되었고 하나의 커뮤니티가 되었다.
그 이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레지오 마리에를 형성한 일도 있었고, 병사들이 모여서 성가대 활동을 하기도 했었고, 병사 탁구 대회를 열어서 탁구 최강자를 가리기도 했었고, 그 외 주말 봉사나 부대에 사는 어린 학생들, 아이들 돌보기 같은 활동들도 있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내 삶에서 가장 충실했던 신앙생활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해온 때가 아닌 군 병사시절 신앙생활이었던 거 같다.
나는 종교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21세기의 종교는 과거의 역할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한때는 질서를 담당했고, 한때는 평화를 이야기했다면, 지금의 종교는 커뮤니티로서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새로운 신자들이 줄어들고 종교의 존재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시대에 종교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커뮤니티로서의 가치를 키워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그런 삶을 살았고 그 가치를 봐왔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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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진짜 썩어 남는 게 시간이다. 주말 아침 눈 뜨고 밥 먹고 청소하고, 그 후에 떠도는 공허함이란. 하루가 절반 이상 남았는데 어떻게 하지. 특히나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 병사생활을 했던 나는 남는 시간들에 뭘 할까 고민이 많았다. 글을 써도 좋지만 열 시간 내내 글을 쓰기에는 손이 너무 아팠고 애초에 개인에게 배정되는 책상조차 없었기에 침대에 엎드려 쓰고 있었어서 장시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말을 하염없이 보내는 와중 동기생에게 같이 뭘 배워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다. 그게 탁구였다.
동기생은 밖에서 탁구를 꽤 배운 듯했다. 자세도 잡혀 있었고 스텝도 곧 잘 밟고는 했다. 그에 비해 나는 탁구의 탁 자도 모르는 초보자, 그 친구는 나를 제대로 키우겠다는 마음을 먹은 듯 자세부터 플레이까지 모든 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날부터 내 삶은 탁구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아침에 눈뜨면 탁구, 점심밥 먹고 탁구, 저녁 되기 전까지 탁구. 주말이면 탁구를 거진 5~6시간씩 쳤고 그때마다 자세, 스텝, 심리전과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타이트하게.
결과적으로 병사생활을 청산하기 직전, 나는 개인용 채로 중국식 펜홀더를 하나 따로 구비해 친구와 대결을 할 정도로 실력이 올라왔고 말년 병장 때는 진짜 하루가 멀다 하고 탁구장에서만 살았다. 물론 다른 악기 취미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 많은 취미들도 탁구를 이기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그 녀석과 전역 후에 함께 탁구를 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더해져서 더 많은 시간을 썼다고 해야 하나. 이제는 다시 탁구 친구를 만들지 못할 거 같은 예감이 들었고, 실제로 그 이후로 탁구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내 중국식 펜홀더는 아직도 운동용품함에 곱게 잠들어 있다. 지금 꺼내도 예전처럼 밸런스 관리를 완벽하게 못해서 쓰지도 못하겠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취미를 가지고 살았다. 고등학교 때 연주했던 베이스 기타를 다시 잡은 때도 군 병사시절이었고, 로망이었던 바이올린을 배웠던 때도 군 병사시절이었다. 당시에는 다양한 취미를 가진 병사들이 많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사실은 핸드폰이 없으니 다들 자신이 잘하는 것들을 가져왔고 그래서 다양한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어딜 가도 한 가지는 잘하는 선생님이 있었고 그 선생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배움의 장이 열린 것이다. 그 사이에 나도 언제나 끼어 있었고.
당시에 배운 것들 중 지금도 계속하는 것들은 없다. 베이스 기타는 간부 전역 전까지 연주하다 이삿짐이 너무 많아 선배에게 팔았고, 바이올린은 그 후 간부생활 때까지 계속 쓰다가 전속 가기 전에 후배에게 선물로 넘겨줬다. 결국 남은 것은 탁구채뿐인가. 가끔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탁구 이야기를 꺼낸다. 당시에는 진짜 날아다녔다고. 매일같이 탁구를 쳤는데 나를 이기는 애들이 없었다고. 물론 다들 믿는다는 표정을 지은 적은 없다. 그 시절에 핸드폰이라도 있었으면 자랑했을 텐데. 과거의 기억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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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병사시절 동기생들과 만남을 가졌다. 작년 8월, 한 친구가 결혼한 후에 만났으니 벌써 1년 만인가. 1년에 한 번, 적어도 2년에 한 번은 정기적으로 얼굴을 보고 있다. 보통 전역 후에 관계가 끊기기 마련인데 벌써 10년째니 꽤나 질긴 인연이다.
만나고 나면 늘 했던 이야기를 반복한다. 병사시절 즐거웠던 이야기들, 힘들었던 이야기들, 탁구 이야기, 생활관 이야기, 당시에 친했던 선임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연락하는가와 같은 이야기들. 그래도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결혼과 삶의 이야기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벌써 한 친구는 결혼에 성공했고 아마 내년이면 애를 가지는 걸 목표로 하지 않을까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친구는 미국에 취업할 기회가 생겼는데 미국으로 넘어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고 하고, 나는 아직도 취직하지 못해서 그냥 노는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듣고, 한 친구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둘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고 하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른이 된 것은 아니다. 내일모레면 30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애다. 순천만 철새도래지에 가보자는 말에 좋다고 가서는 새 구경, 갈대 구경은 안 하고 진흙 속에서 가끔씩 게가 나온다는 이야기만 하는 친구부터 그건 게가 아니고 진흙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나, 그걸 찾아보자고 하루종일 진흙만 쳐다보며 돌아다니는 친구들까지. 정말이지 만 원짜리 진흙 구경이었다.
과연 이런 즐거움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분명 미래에는 소득 차이도 심해질 거고 각자 사는 공간도 멀어져서, 혹은 생각이 달라져서 멀어질지도 모른다. 당장 나는 내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 일을 준비한다고 했고 가장 돈이 안 되는 일을 하려고 하고 있으니 그 친구들에 비하면 벌이가 심심한 수준일지도. 이제는 술을 마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고는 한다. 지금은 친구지만 언젠가는 멀어질지도 모른다. 영원한 친구는 없고 애초에 영원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
그래도 옛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그런 이야기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는 점이다. 정말 어린 시절에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래도 우리는 친구인데, 하면서 서운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제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여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이야 한 명만 결혼한 상태니 결혼한 친구의 집 근처인 광양에서 모였지만 앞으로 기혼자가 늘어나면 어디에서 모일지로 싸움이 붙을지도 모른다. 가족들에게 시간을 써야 해서 모이지 못할지도 모르고 모여도 예전처럼 즐거운 이야기만 하며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다. 29살 마지막에 함께하는 모임. 사실상 연말 파티라고 해도 좋은 모임.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주말이 끝나면 또 다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돌아갈 일상이 없는 사람은 나뿐이다. 마지막 식사는 아주 매콤하고 기름진 라면으로, 그래도 우리스러운 식사로 마지막을 보내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광양까지 그리고 광양에서 서울까지, 다음에도 갈 수 있을까.
오늘은 즐거운 이야기를 조금 많이 적어봤다. 지난 이야기가 좀 축 쳐지는 이야기여서 이번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적고 싶었고, 무엇보다 내 이야기를 적어보고 싶었다. 사실 지난 이야기를 쓸 때 한참을 고민했고 실제로도 글이 많이 나오지 않아 힘들었다. 생각해 보면 나쁜 이야기가 자꾸 떠올라 꼬리에 꼬리를 물듯 적었지만 내 군생활은 즐거운 일이 더 많았을지도. 다음에는 내 병사생활의 마무리와 하사생활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써보려고 한다. 다음에는 아마 줄글의 긴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또 추억을 여기에 붙여본다. 이번 추억들은 나쁜 기억보다 더 큰 종이에 즐겁게 쓸 수 있었어서 좋았다. 좋은 추억을 너무 많이 모으면 군대가 그리워지는 거 아니야. 그러면 안 되는데. 걱정도 조금 웃음도 조금 여러 가지 마음을 품고 다음 이야기를 또 써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