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동창
근래에 동창들을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3월에는 결혼식을 갔는데 4월에는 예기치 못한 번개모임까지 가졌으니, 아마 20대의 가장 바쁜 순간을 살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졸업 이후로 수년만에 만나는 친구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미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닐까. 약속 장소로 향하며 올라온 불안한 마음은 그들의 얼굴을 보고 눈 녹듯 사라진다.
변함없는 얼굴의 친구들은 낯익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겨준다. 나 또한 그 시절의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는다.
금요일 저녁에 동창들과 번개모임을 가졌다. 계기는 별 거 없었다. 아직도 내가 대구에서 근무하는 줄 알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이 와서 내 근무지를 알려줬다. 그런데 위치를 보니 우연히 다들 충청도에 모여 있어서 그대로 시간을 내서 충북에서 모이는 것으로. 평소 시간 내기도 어려워하던 녀석들이 무슨 우연인지 그날따라 모두 모일 수 있다는 답을 내줬고 나는 답을 받고 금요일이 되자마자 약속 장소로 올라갔다.
약속장소에 모인 동창들은 그 시절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누구는 예전보다 피부가 좀 좋아졌고, 누구는 그때보다 독기가 빠졌다. 그리고 누군가는 수년 전 기억하던 그 얼굴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모이니 고등학생이 된 것만 같은데 대화를 나눠보면 그렇지도 않다. 정겹게 나누는 대화에서 이미 우리는 누군가의 선배고, 후배며, 동료임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커서 뭐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 학생들이 이제는 사회인이 되어 서로 한 잔씩 술을 나누고 있다니.
여러 짧고 긴 이야기가 오갔다. 내가 일하는 근무지, 나의 전역, 군에 입대하지 않은 친구의 사회생활, 충북의 부대서 근무하는 친구들의 고충, 그리고 추억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 누구는 지금까지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누구는 전역 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잠깐 방황하다 친구의 조언으로 길을 찾아가고 있다고 한다. 누구는 당장의 일이 급급해 주위를 둘러볼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아직 걱정을 다 떨쳐내지 못했다.
우리는 나름대로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을 것이다. 단지 그 길에 뭐가 있는지 아직 모를 뿐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정표가 아니다. 내가 간 길은 나만 걸을 수 있을 뿐 남이 내 길을 따라 걸을 수도 없고 내가 남의 길을 뒤따라 걸을 수도 없다. 하지만 서로의 등불이 되어 줄 수는 있다.
누군 돈을 많이 벌어, 집이 부유해, 좋은 직장을 가졌어. 질투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기엔 지금 우리가 보내는 20대는 그렇게 멋지지 않아 보인다. 그냥 서로의 등불이 되어 가끔 힘들 때 멀리서 빛을 비춰주고 내가 여기서 살고 있다고 보여주는 것 만으로. 우리의 관계는 충분하지 않을까. 먼 미래에는 분명 서로 질투할 일이, 시기할 일이, 미워할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으면 좋겠다. 이런 만남이 30대에도, 40대에도, 언제나 또 있으면 좋겠다.
이번 모임에 유일하게 최근 결혼한 친구만이 참석하지 못했다. 결혼식날 가겠다고 이야기했지만 긴급하게 발생한 작전으로 나와 비슷한 신분을 가진 이들 모두가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봤으면 했는데. 참 일정이 맞지 않아서 아쉬울 따름이다. 물론 아직 신혼이니까 하루하루 소중한 시간을 뺏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1박 2일 일정이 끝난 이후로는 집에 겨우 들어와 잠만 자면서 주말을 보냈던 것 같다. 사실 내려오는 길도 좀 위험했다. 눈이 반쯤 감긴 채로 내려왔는데 중간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몇 번은 멈췄다. 역시 하루 세 시간씩 달리는 일은 언제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나름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최근에는 나일강의 죽음을 오디오북으로 듣고 있다. 운전하면서 간간히 듣는데 처음 성우분들의 연기가 얼마나 연극풍으로 과장되게 이야기를 하시는지 듣는 나도 미쳤어 미쳤어! 소리치면서 듣게 되더라. 아마 좀 오글거리는 대화를 못 참는 분들은 처음 부분을 참기 힘드시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오디오북은 오디오북만의 재미가 있다. 하나의 극작품을 보는 듯한 묘미, 아마 이젠 운전할 때마다 오디오북을 틀어 놓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