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사회생활하는 대학생 이야기
긴 휴가에 들어섰다. 정확히는 휴가를 보낸지 좀 됐다. 12월 1일 부로 전역 전 휴가 시작, 이제 나는 3월 31일까지 돈은 받지만 일은 안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백수가 되었다.
사실 백수생활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20살부터 28살의 끝자락까지 나는 늘 7시면 일어나 출근하고 5시 30분이면 퇴근하는 인생을 살았다. 다른 이에게는 2년, 혹은 그보다 짧은 순간이었을 군생활이지만 내게는 20대의 전부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느 날 갑자기 더이상 7시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늘 머릿속으로 그리던 상상이 처음으로 현실로 이루어진 날 내가 느낀 감정은 공허함과 불안이었다.
12월이 끝나간다. 12월 전후로 바쁘게 살았던 반동인지 계획했던 일들도 안개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버리고 결국은 짧은 휴식이라는 작은 소망만이 손 안에 남았다. 11월 중순부터 이사 준비, 퇴직 준비에 감기까지 더해져 골골거리고 12월 본가에 올라온 이후로는 나와 형이 같이 지낼 방을 만들기 위해 집안 가구를 옮긴다고 분주했으니 그 반동이 모든 일이 끝난 12월 중순 이후에 온 것이다.
솔직히 이렇게 나른하게 보내는 시간이 지금도 익숙하지는 않다. 20살이 되고 2월에 입대한 이후로 단 하루도 쉬지않고 달렸다. 병사 생활을 마쳤고 하사를 달았다. 하사에서 중사로 진급하기 위해, 그리고 한 명의 정비사로 살기 위해 노력했고 중사가 되었다. 그 사이사이 짧은 휴가는 있었지만 동창들에게 늘상 해왔던 "한 달만 쉬어보고 싶다."의 한 달이 내 20대에는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러니 익숙하지 않을 수 밖에.
12월 중순까지 모든 일들이 정리되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못했던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11월 말에 출시 예정이라는 말에 예약구매까지 걸어놨던 환세취호전 플러스, 형의 추천으로 시작해서 3일만에 골드 랭크까지 올린 이터널리턴, 그리고 멀티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을 빌미로 형과 함께하기 위해 샀던 발더스게이트3까지. 생각해보면 꽤 많은 게임을 한다고 시간을 썼다.
그리고 외할아버지 납골당을 다녀오고, 중학교 동창을 만나고, 영화도 보러 다녀오고... 막상 이렇게 적고 보니 적은 일을 한 것은 또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창하게 세워놓은 주변 지인들 차로 돌아다니면서 전부 만나기같은 계획을 이루지 못해서일까, 무언가 거대한 것이 나를 쫓고 있는 것마냥 쫓기는 기분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늘 이렇게 살아왔다. 무언가에 쫓기며 살아왔고, 도망치기 위해 부단히 달렸다. 칭찬을 받아도 언제나 불안한 마음이 있었고 성공 다음에는 어떤 것을 또 성공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았다. 이제는 내려놓고 싶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나는 다시 시작점에 섰고, 이제 다시 처음부터 달려야하니까.
부단히 살아온 내게 결국 남은 것은 예비역 중사라는 사회에서는 인정해주지 않는 허접한 이름과 2개의 대학 명판, 그리고 몇 개의 자격증이 전부다. 지금 내가 손에 쥔 것들이 앞으로 내가 가려는 길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멈추지 말아야지. 이렇게 20대가 되어 처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보낸 긴 12월을 보내며 에너지를 채웠으니까.
오랜만에 쓰는 글에 손가락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6개월 전과는 많은 것이 변했다. 여자친구와는 헤어졌고, 나 혼자서 보낼 수 있었던 공간이 사라지면서 온전히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줄었다. 자꾸 다른 것들에 눈이 돌아가기도 하고 글을 써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막상 컴퓨터 앞에 진득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릴 시간을 나 스스로 만들지 못해 한참을 보내다 이제서야 글을 쓰기 시작헀다.
지인들은 아직도 내게 왜 오래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냐고 묻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