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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석영 May 19. 2020

코로나가 되살린 야생, 잭 런던 <야성의 부름>

잭 런던,《야성의 부름》, 개와 늑대

코로나-19 사태가 초래한 전 세계적 봉쇄령(lockdown)의 기세도 이제는 제법 숙지근해진 느낌이다. 그 기세가 맹렬했을 때, 우리는 놀라운 소식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흔적을 찾기 어려웠던 야생동물들이 도시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었다.      


인도의 나가온(Nagaon) 시내 한 사원에는 거위 떼가 행진을 했고, 프랑스 코르시칸(Corsican) 해변에서는 소들이 사람 대신 산책을 했다. 칠레의 산티아고의 거리에는 퓨마가, 웨일즈의 어느 소도시에는 산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의 나라(奈良) 시에는 사슴들이, 뉴질랜드 크라이스처치 시에는 산토끼가 나와 활보했다. 인스타그래머들은 런던의 한 도로에서 야생 여우들을, LA 시의 한 경기장 주변에서는 코요테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었다.      


이 야생동물들은 도시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걸까? 블룸버그 그린(Bloomberg Green)에 올라온 이 뉴스를 접했을 때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간 소설이 있었다. 미국 소설가 잭 런던(Jack London)의 《야성의 부름》(권택영 옮김, 민음사)이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미국 남부의 어느 포실한 가정에서 자란 개가 북극 지역에 끌려가 극렬한 노동에 시달리며 자신의 야성을 회복해가는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세인트버나드 종 아버지와 셰퍼드 종 어머니를 둔 주인공 벅은 자신과 자신의 부모를 길들였던 인간을 떠나, 인간에게 의존하며 살았던 제 가까운 선조들의 삶을 떠나, 먼 과거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 돌아감은, 미국 남부지역 어느 판사 집의 잔디밭과 목장과 과수원을 천진하게 뛰어 놀던 개가 “오로지 자신의 힘과 수완으로 살아 있는 동물들을 잡아먹고 사는 맹수”가 되는 대전환의 여정이었다.        


이 이야기의 제목이 되는 ‘야성의 부름(call)’은 이 대전환의 매개물이다. 이 부름을 벅이 처음 들은 건, 북극에서 썰매 개로 일하던 시절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러나 그 “밤의 노래”는 야생동물들이 아니라 야생 늑대 종 에스키모 개들의 목청에서 나왔다. “그것은 오래된 노래, 개 종족만큼이나 오래된 노랫소리로” 그 노래에는 “수많은 세대의 슬픔이 담겨 있”었다.      


이야기의 후미에서 벅은 자신에게 따뜻한 호의를 보여주는 새로운 주인 숀턴과 함께 호시절을 누리는데, 이때 다시 자신을 부르는 야생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소리 앞에서 그는 “커다란 불안과 이상한 욕망”을 느꼈고, “저항할 수 없는 충동”과 함께 숲으로 달려갔다.      


이 질주는 그야말로 깨어남이었다. 벅은 숲을 배웠고, 숲속에서 사는 법을 익혔다. “인간들이 책을 읽듯이 기호와 소리들을 읽었고” 며칠간 숲속에서 제힘으로 남을 죽여서 먹고 살아가는 자연의 법을 터득했다. 어느 날 밤 만났던 “몸이 가늘고 긴 잿빛 늑대”를 다시 만나려고 숲을 헤매는 동안 벅은 완전히 다른 동물로 변신했다. 그는 이제 자연이 빚어낼 수 있는 최고의 자연력을 발산하는 빛나는 존재, 고대 로마인들이 늑대에서 보았던 신적 우아함(로마인들의 신화에서 늑대는 자신들의 조상이다)의 주체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의 근육은 활력으로 넘쳐흘렀고 강철로 만든 용수철처럼 타다닥 날카롭게 튀어 올랐다. 기쁨과 자유로움으로 홍수처럼 찬란히 온몸에 가득 찬” 그의 “생명력이 드디어 폭발하고 순수한 황홀감 속에서 산산이 흩어져 세상 속으로 풍요롭게 넘쳐흘렀다.”      


또한 “그는 더 이상 걷지 않았다. 그는 한순간에 야생동물이 되어 나무 그림자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휙 사라졌고, 스치는 그림자처럼 고양이 발로 살금살금 돌아다녔다. 그는 모든 은신처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알았고 뱀처럼 배로 기어가다가 펄쩍 뛰어 한순간에 공격하는 법을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곰이나 사슴만이 아니라 인간도 죽인다. 사랑하는 주인 숀턴을 해친 이들의 목을 찢었고, 이로써 남부의 집을 떠난 날부터 지금껏 자신을 옥죄던 “곤봉”의 지배력, 태어날 때부터 몸에 축적되었던 인간의 지배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한다.      


그러나 그를 인간의 세계로 연결해주던 최후의 실낱같은 존재였던 숀턴은 이제 지상에 없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답변은 정해져 있었다. “몸이 가늘고 긴 잿빛 늑대”의 무리가 그에게 찾아왔고, 그는 그 무리에 합류한다. 결국 그는 그 지역 인디언들에게는 “악마”로 불리는 무서운 늑대 우두머리가 된다.      


무리에 합류하는 순간, 늑대 무리의 수장이 밤하늘을 향해 길게 울자 나머지 늑대들도, 벅도 따라 길고 슬픈 울음소리를 뽑아냈다. 야생이 부르던 소리에, 벅이 최종적으로 응답한 소리였다. (이 “밤의 노래”는 크게 3가지 기능을 한다고 한다. 의사 전달, 유대감 형성, 무리의 세력권을 다른 무리에게 알림이라는 기능이다. 《늑대와 야생의 개》, 기쿠수이 타케후미 감수, 곤도 유키 본문, 사와이 세이이치 사진 해설, 박유미 옮김, 라의눈)      


소설에서 어느 백인 부자의 눈짓 하나에 꼬리를 치며 달려가던 개는 자신이 속하던 인간세계의 울타리를 뛰어넘었고, 최종적으로는 인간에게 위협적인 야생의 존재로 거듭난다. 상류로, 봉우리 쪽으로 올라가서는 정상에 서서 바라보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 이 소설이 발표된 1903년 이후, 아니 그 이전부터 늑대들은 소설의 내용과는 정반대로 인간을 피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삶을 살았다. 이 소설에 나오는 늑대인 회색 늑대들은 한때 북반구의 전 지역에서 서식했지만, 수백 년간 인간에게 밀려 미국이나 북서유럽 (스페인, 포르투칼 등 예외가 있다), 인도, 한국, 일본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20세기 후반 늑대가 생태계 건강을 유지하는 종으로 알려지면서 종 개체수 복원 노력이 이어졌고, 현재 전문가들은 이들의 개체수 증가세가 상당히 “안정적”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떠났던 늑대들마저 한반도를 찾아오는 날이 있게 될까? 20세기 초반, 벅과 동료들이 밤하늘로 쏟아내던 그 밤의 노래를, 설악산과 북한산 자락에서 듣게 될 날이 우리가 사는 동안 오게 될까? 벅이 경험한 대전환 같은 어떤 대전환을 인류도 경험할 수 있을까?


*출처: 한겨레신문, 우석영의 동물+지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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