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oria
롤스는 고등학교 생활과윤리 교육과정에서 가장 자주 출제되는 사상가이기도 하면서, 가장 내용이 어렵고 난해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롤스는 고등학교 생활과윤리 교육과정에서 총 3번 등장하는데, 분배 윤리 단원, 시민 불복종 단원, 해외 원조 단원에서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분배 윤리 단원과 시민 불복종 단원은 주로 롤스의 저서 중 <정의론>이라는 저서에 근거하여 내용이 구성되어 있고, 해외 원조 단원은 <만민법>이라는 저서에 근거하여 내용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의론>과 <만민법>은 롤스라는 한 철학자의 저술이므로 두 저술 간에 겹치는 내용도 존재하며, 두 저술 간에 상충하는 내용도 존재합니다. 철학자가 아무리 똑똑해도 한계가 있는 인간이므로 어쩔 수 없는 실수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철학자의 사상이 변화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생활과윤리 과목을 학습하고 수능 문제를 해결할 때는 정확한 지식에 근거하여 학습 및 문제해결을 해야 하므로, 이번에는 롤스의 '질서 정연한 사회'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정의론>과 <만민법>이 어떻게 다르게 서술하고 있는지, 수험생들은 두 저술의 상충하는 지점과 관련하여 어떻게 학습하면 좋은지, 교육과정은 어떻게 수정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롤스의 '질서 정연한 사회' 개념은 고등학교 생활과윤리 교육과정에서 주로 해외 원조 단원에 등장합니다. 고등학교 생활과윤리 5종 교과서 중 비상교육과 지학사의 서술을 살펴보겠습니다.
질서 정연한 사회는 구성원들의 선을 증진해 주면서도 정의관에 의해 효과적으로 규제된다.
- 비상교육 생활과윤리 교과서 -
질서 정연한 사회: 사회의 기본 제도가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칙에 따라 편성, 운영되며, 이러한 사실을 사회 구성원이 알고 있는 사회이다.
- 지학사 생활과윤리 교과서 -
이러한 교과서의 서술들을 반영하여 ebs 연계교재에서는 해외 원조 단원에서 롤스의 질서 정연한 사회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선(善)을 증진하기 위해 세워지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정의관에 의해 효과적으로 규제되는 사회로서, 모든 사람이 타인들도 동일한 정의의 원리를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회이며, 사회의 기본 제도가 정의의 원리를 만족시키고 있으며, 또한 만족시킨다는 것이 알려져 있는 사회
- ebs 수능특강 생활과윤리 -
이 서술은 ebs 연계교재에서 오랫동안 크게 변경 없이 유지해 온 서술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 서술은 롤스의 <정의론>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회가 그 성원들의 선을 증진해줄 뿐만 아니라 공공적 정의관에 이해 효율적으로 규제되는 경우, 그 사회를 질서정연한(well-ordered) 사회라 해보자. 즉, 그것은 (1) 다른 사람도 모두 동일한 정의의 원칙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모든 이가 인정하고 있고, (2) 사회가 기본 제도가 일반적으로 이러한 원칙을 충족시키고 있으며, 그 사실 또한 널리 주지되어 있는 그러한 사회를 말한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상호 간에 비록 과도한 요구를 하게 될지도 모르나, 그 요구를 판정하게 될 공동의 입장을 인정하게 된다.
- 롤스, <정의론> -
<정의론> 원전의 내용과 교과서 및 ebs 연계교재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교과서와 ebs 연계교재가 <정의론>의 해당 구절을 참고하여 질서 정연한 사회의 의미를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교과서와 ebs 연계교재는 <만민법>이 아니라 <정의론>에 의거하여 해외 원조 단원에서의 롤스의 '질서 정연한 사회'의 의미를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과서든 ebs 연계교재든 해외 원조 단원에서의 롤스 주장의 다른 내용들은 거의 모두 <만민법>에 의거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질서 정연한 사회의 의미는 <정의론>에 의거하여, 해외 원조 단원의 내용들은 <만민법>에 의거하여 서술하고 있으니 바로 여기서 내용의 충돌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정의론>과 <만민법>은 모두 롤스의 저술이지만 <정의론>은 롤스가 1971년에 저술한 책이고, <만민법>은 1999년에 저술한 책이므로 롤스의 생각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롤스는 <정의론>에서 질서 정연한 사회의 기본 제도가 일반적으로 정의의 원칙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의 원칙 중 제1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각자는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하여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 롤스, <정의론> -
롤스가 제시한 정의의 원칙 중 제1원칙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적용되는 사회에서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누립니다. 기본적 자유에는 정치적 자유(투표의 자유와 공직을 가질 자유), 언론과 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심리적 억압과 신체적 폭행 및 절단을 포함하는 인신의 자유(인신의 온전성), 사유 재산을 소유할 권리, 법의 지배라는 개념이 규정하는 이유 없는 체포와 구금으로부터의 자유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험생들이 해외 원조 단원에서 배우는, <만민법>에서 제시되어 있는 질서 정연한 사회는 모든 사람이 기본권을 동등하게 누리지 않습니다. <만민법>에서 제시되는 질서 정연한 사회에는 2개의 사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유적 만민의 사회, 다른 하나는 적정 수준의 만민의 사회입니다. 이 두 개의 사회 중에서 적정 수준의 만민의 사회는 비자유적이고 엄연히 위계가 존재하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 자유나 기본권을 동등하게 누리지 않습니다.
비자유적 사회의 기본 제도가 구체적인 정치적 옳음과 정의의 조건들을 충족하고, 자신들의 비자유적 만민이 만민들의 사회를 위한 합당하고 정의로운 법을 존중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자유적 만민은 그 사회를 관용하고 수용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더 적합한 명칭이 없기에, 나는 그러한 조건들을 충족하는 사회들을 적정 수준의 만민(decent peoples)이라 부른다.
- 롤스, <만민법> -
적정 수준의 위계적 사회의 인간관은, 두 번째 기준에 함축된 것처럼, 개인들이 먼저 시민들이어야 하며 평등한 시민으로서 동등한 기본권이 있다는 자유주의 이념을 수용할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계적 사회의 인간관은 개인들을 그들이 각자 속한 집단에서 책임 있고 협력적인 성원으로 간주한다.
- 롤스, <만민법> -
롤스가 <만민법>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을 참고하면, 질서 정연한 사회에 포함되는 적정 수준의 사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으며, 자유적이지 않고 비자유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정의론>에서 이야기하는 질서 정연한 사회와 <만민법>에서 이야기하는 질서 정연한 사회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의론>에서 롤스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을 포함하여 모든 정의의 원칙이 개인의 재능이나 사회적 지위와 같은 우연성의 영향을 배제하는 가상적 상황인 원초적 입장에서 합의한 산물이고, 이러한 정의의 원칙은 국내에서의 정의 달성을 위해 적용된다고 주장하는데요. <만민법>에서 롤스는 적정 수준의 사회는 국내 차원에서 원초적 입장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즉, 적정 수준의 사회는 국내 차원에서 정의의 원칙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정 수준의 위계적 사회의 경우에는 이 사회의 기본 구조의 형태를 도출하기 위한 원초적 입장이 없다는 점에 주목하라. 원초적 입장은 사회계약론적 관점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국내 정의를 위한 원초적 입장이란 논법은 자유적 개념이다. 이런 자유적 논법은 적정 수준의 위계적 사회(decent hierarchical societies)의 국내 정의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만민법은 원초적 입장을 단지 세 번만 사용한다. 자유주의 사회들을 위해 두 번(한 번은 국내 차원에서, 다른 한 번은 만민법의 차원에서) 사용하고, 적정 수준의 위계적 사회들을 위해 두 번째 수준에서만 한 차례 사용한다. 단지 평등한 합의 당사자들만이 원초적 입장에서 대칭적인 입장에 서게 된다. 평등한 만민이나 이들의 대표들은 만민법의 차원에서 평등한 합의 당사자다. 다른 차원에서 유럽공동체나 구소련의 공화국 연합과 같은 종류의 지역 연합체들이나 연방들로 함께 결합될 때, 자유적 만민과 적정 수준의 만민을 원초적 입장에서 함께 생각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 롤스, <만민법> -
위 원전 내용을 참고하면, 질서 정연한 사회 중 자유적 만민의 사회는 국내 차원과 만민법의 차원에서 모두 원초적 입장을 사용합니다. 즉 자유적 만민의 사회는 만민법의 차원뿐만 아니라 국내 차원에서도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여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고 그 정의의 원칙에 따라 사회를 운영합니다. 반면 적정 수준의 만민의 사회는 국내 차원에서는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지 않고 만민법의 차원에서만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므로 국내 차원에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고 그 정의의 원칙에 따라 사회를 운영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고 사회 내에서 위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 <정의론>에 서술되어 있는 질서 정연한 사회의 의미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정의론>에서 이야기하는 질서 정연한 사회의 의미와 <만민법>에서 이야기하는 질서 정연한 사회의 의미가 다르게 된 것일까요? 이는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두 책의 저술 시기가 크게 차이 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롤스의 생각에 변화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999년에 저술된 <만민법>은 1971년에 저술된 <정의론>에서 제시된 개념 및 이론에 입각해서 저술되었다기보다는 1997년에 롤스가 저술한 <정치적 자유주의>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정치적 자유주의>는 고등학교 생활과윤리 교육과정에 반영되어 있는 책이 아니므로 수능 수험생이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만민법>의 역자이신 장동진, 김만권, 김기호 교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습니다.
롤스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기틀로 하여, 자유적 만민들과 비자유적이지만 협력을 원하는 적정 수준의 만민들이 어떻게 만민법이라는 정의의 내용들을 합의하고 준수할 수 있는지, 그리고 협력을 거부하는 무법 국가와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고통받는 사회를 어떻게 협력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 제시한다. 이 저작을 통해 롤스는 자신의 <정의론>에 제시된 "차등 원칙"을 국제사회로 확장하려는 세계시민주의 프로젝트와 상이한 견해를 제시하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들 간의 논쟁을 통해 롤스의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에 내재한 기본 틀이 서로 상이함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 롤스, <만민법>, 역자 해설 -
위에 제시했던 생활과윤리 2종 교과서와 ebs 연계교재는 해외 원조 단원에서 질서 정연한 사회의 의미를 <정의론>에 제시된 내용에 근거하여 서술하고, 롤스의 해외 원조와 관련된 다른 주장들은 모두 <만민법>에 제시된 내용에 근거하여 서술했으므로, 이러한 서술은 <정의론>이 저술된 1971년과 <만민법>이 저술된 1999년 사이에 있었던 28년 간의 롤스 생각의 변화를 고려하거나 반영하지 못한 것입니다. 롤스의 해외 원조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대부분이 <만민법>에 있는 내용에 근거하여 서술 및 출제되고 있으며 2종 교과서 및 ebs 연계교재의 질서 정연한 사회의 의미에 대한 서술은 <만민법> 내용과 논리적으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2종 교과서 및 ebs 연계교재에 있는 질서 정연한 사회의 의미와 관련된 내용은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