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체와 작용의 구분
지금까지 평가원이 출제한 수능이나 모의고사에서는 대부분 이이가 리를 작용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고 출제했으며, 따라서 보통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황은 리에 작용이 있다고 보았고(이기호발설) 이이는 리에 작용이 없다고 보았다고(기발이승일도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어떤 윤사 수능대비 문제집에서 이이도 리가 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음을 가리키는 내용이 있었고, 이 내용이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 충돌하기 때문에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질문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험생들의 혼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자 원전, 한국철학 도서, EBS 연계교재, 기출문제, 교과서 등을 열심히 읽어 보았습니다.
우선, 대부분의 책들이 이이는 리가 작용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고 서술하고 있었습니다.
이이는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는 가운데 (중략) 이러한 생각은 기대승의 주장을 조금 더 분명하게 체계화한 것으로 이나 기가 모두 작용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이는 선의 근원이고 기는 악의 근원이라는 이황의 견해를 완전히 부정한 것입니다.
- 김교빈, <한국철학 에세이> -
율곡의 이기지묘에 대한 위의 설명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그 본의를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이는 작용함이 없고[無爲] 기는 작용함이 있기[有爲] 때문에 기는 발하고 이는 타는 것"이라는 기발이승의 원칙이 견지되고 있다.
- 김영경, <한국사상과 마음의 윤리학> -
이이에게 있어서 작용 혹은 운동하는 것은 오직 기뿐이다. 이는 스스로 발할 수 없다. 단지 기가 발하는 데 있어서 원인이 되고 주재가 될 뿐이다.
- 김병찬, <서양 동양 한국윤리> -
위 책들의 내용을 참고하면, 이이는 리가 아니라 오직 기만이 작용이 있는 것으로 보았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EBS 연계교재의 서술도 찾아보았습니다.
이이는 작용이 없는 이는 발하는 까닭이고 작용이 있는 기는 발하는 것이므로 '기는 발하고 이는 탄다.라는 한 가지 길만 있다고 보고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하고 이가 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2023학년도 수능완성 윤리와사상 해설 8p-
이이에 따르면 이는 형태와 작용이 없고(무형무위) 기는 형태와 작용이 있다(유형유위). 그리고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이통기국).
-2022학년도 수능특강 윤리와사상 해설 12p-
EBS 연계교재의 최근 해설도 역시 이이는 리를 작용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가 일반적으로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갖고 있는 지식입니다.
하지만 동양 사상에서는 어떤 존재나 사물이 있을 때 이를 본체와 작용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본체인 성과 작용인 정으로 구분하여 설명한 주희, 자성을 본체인 정과 작용인 혜로 구분하여 설명한 지눌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이는 주희의 성리학적 입장을 받아들이고 계승한 학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본체와 작용의 구분법' 또한 받아들이고 계승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리에는 작용이 없는 것일까요? 이이의 율곡전서 원전을 참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천지의 이, 만물의 이, 사람의 이가 하나인 것은 통체일태극인 동시에 이일(理一)이요, 비록 하나의 이(理)이지만 인성, 물성, 견성, 우성이 각각 구별되어 다름은 각일기성으로 이것이 분수의 측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지리(一本之理)는 이(理)의 체(體: 본체)이고 만수지리(萬殊之理)는 이(理)의 용(用: 작용)이다. 그런데 이의 체는 하나인데 어떻게 그 작용이 만 가지로 다른가. 그것은 기(氣)가 같지 않으므로 유행 변화하는 기를 탄 이는 만수지리로 전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이이, <율곡전서> -
이이가 직접 저술한 <율곡전서>의 내용을 보면, 이이 역시 리의 작용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위의 서술은 본래 리는 하나(본연지리, 리일지리, 일본지리)이지만, 유행하는 기를 타는 작용을 하면서 사람마다, 사물마다, 개마다, 소마다 다른 리와 본성(유행지리, 분수지리, 만수지리)을 갖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 부분을 참고했을 때, 이이가 말하는 리의 작용은 '유행 변화하는 기에 타는 작용'이므로 리의 '능동적 작용'은 인정했다고 보기 힘들더라도 리의 '작용 자체'는 인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한문 원전에 직접 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이는 자신의 수양론을 주장함에 있어서 교기질(矯氣質: 기질의 교정)을 강조했습니다. 즉, 이이는 기질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인 본연의 리보다 현실 속에서 기질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유행의 리를 강조하고, 리의 순선함을 잃게 만드는 기질을 교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행의 리는 기질의 영향을 받아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이의 대표적 주장인 이통기국론은 이이가 유행의 리를 강조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논리입니다.
대개 리의 본연은 순선하나, 이미 기를 탈 즈음에는 고르지 못하고 가지런하지 않다. 맑고 깨끗하며 지극히 귀한 물건이나 지저분하고 더러우며 지극히 천한 곳에도 리가 존재하지 않는 데가 없다. 그런데 맑고 깨끗한 물에 있으면 리도 역시 맑고 깨끗하며, 지저분하고 더러운 곳에 있으면 리도 역시 지저분하고 더러워진다. 만약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을 리의 본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옳거니와 지저분한 더러운 물에는 리가 없다고 한다면 옳지 못한 것이다. 대개 본연이란 것은 리일이요, 유행이란 것은 분수이다. 유행의 리를 버리고 따로 본연의 리를 구하는 것은 진실로 옳지 않다.
- 이이, <율곡전서> -
리일지리와 분수지리가 이렇게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이는 유행하는 분수지리를 떠나 본연의 리를 따로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보편적인 리도 결국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기를 통해 실현되고 완성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이는 분수를 떠나 리일을 주장하거나, 기질을 떠나 본연을 찾는 것을 옳지 않다고 간주한다. (중략) 이이는 리일지리와 분수지리 중에서 분수지리에만 실질적 의미와 현실성을 부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이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기의 국한성을 가지는 개별자들일 뿐이며, 그 기에 의해 제한된 분수지리와 독립적으로 만물에 보편적인 하나의 리인 리일지리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 한자경, <한국철학의 맥> -
위의 논의를 종합하면, 이이는 이통기국론과 교기질의 관점에서 기질의 영향을 받는 유행지리를 강조하면서 리의 작용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理)에 본체와 작용이 있다는 것은 본디 그러합니다. 근본을 하나로 하는(一本) 이는 이의 본체이며 만 가지로 다른(萬殊) 이는 이의 작용입니다. 이가 어떻게 만 가지로 달라지겠습니까? 기가 고르지 못하므로 기를 타고 유행하면 곧 만 가지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가 어떻게 유행하겠습니까? 기가 유행할 때에 이가 그 기틀을 타기 때문입니다.
- 이이, <답안응휴> -
지금까지의 논의에 의하면, 위에 있는 한국철학 도서들이나, EBS 연계교재의 서술은 모두 오류가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출제되었던 평가원의 기출 문제 또한 오류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2018학년도 6월 모의평가 윤리와사상 11번 문제입니다. 답은 ②번으로 출제되었습니다. 즉, ㄹ 선지가 맞는 선지로 출제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이가 리에 작용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면 ㄹ 선지는 이황과 이이가 모두 부정하는 선지가 되기 때문에 틀린 선지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정답이 없고 출제 오류의 소지가 있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2019학년도 9월 모의평가 윤리와사상 12번 문제입니다. 답은 ③번으로 출제되었습니다. 즉, ㄴ 선지가 맞는 선지로 출제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이가 리에 작용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면 ㄴ 선지는 이황과 이이가 모두 부정하는 선지가 되기 때문에 틀린 선지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정답이 없고 출제 오류의 소지가 있는 문제입니다.
교과서에서는 과연 이이가 리의 작용을 인정했다고 보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교학사>
<미래엔>
<씨마스>
<천재교육>
윤리와사상 교과서를 참고했을 때, 이이가 리의 '작용 자체'를 부정했다고 볼만한 부분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리의 '스스로 움직임', '현실에서의 구체적 작용', '능동적 작용', '운동성'을 부정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이가 리의 '작용 자체'를 부정했다고 보았던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던 것일까요? 아마 이이의 <율곡전서>에서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인 다음 구절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리는 무형이고 기는 유형이며, 리는 무위이고 기는 유위이다. 무형이고 무위로서 유형과 유위의 주(主)가 되는 것은 리(理)요, 유형이고 유위로서 무형과 무위의 기(器)가 된 것은 기(氣)이다.
- 이이, <율곡전서> -
이 구절에서 '리는 무위'라는 구절로 인해 리는 작용이 없다는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인데요. 하지만 무위(無爲) = 무용(無用)은 아닙니다. 위(爲)는 '~하다'의 의미로 능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용(用)은 '영향을 미치거나 현상을 일으키다'의 의미로 능동적인 의미가 반드시 포함된 개념어는 아닙니다. 즉, 무위를 '작용이 없다'라는 의미로 성급하게 해석함으로써 이이는 리가 작용이 없다고 보았다는 오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지금까지 이이가 리의 작용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과 관련된 내용인 이이의 일본지리와 만수지리,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이일분수와 기일분수 등의 내용은 교육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1. 일본지리 및 만수지리, 이일분수 및 기일분수와 관련된 내용이 직접적으로 출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2. 하지만 '능동적', '구체적' 등의 수식어 없이 단순하게 이이가 리의 '작용'을 인정했는지에 대해 묻는 문제가 나온다면, 이이가 리의 작용을 인정한 것으로 보고 문제를 푸는 것이 학문적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평가원이 이 부분을 출제한다면 아마 이이가 리의 작용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정답으로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래서 수험생 여러분께 어떻게 생각하고 문제를 풀라고 과감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겠네요... 평가원이 '작용'이라는 단어만 달랑 주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3. 만약 문제에서 이이의 리의 '스스로 움직임', '운동성', '능동적 작용' 인정 여부를 묻는 문제가 출제되었다면,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문제를 푸세요(작용이라는 개념어를 스스로 움직임, 운동성, 능동적 작용과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표현들은 교과서의 서술이니까요. 아마 교과서의 서술은 이 구절을 바탕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양(陽)이 동(動)하면 이가 양에 타는 것이지 이가 동하는 것이 아니며, 음(陰)이 정(靜)하면 이가 음에 타는 것이지 이가 정하는 것은 아니다.
- 이이, <율곡전서> -
다만, 만약 리가 '스스로 움직임'이라고 출제되지 않고 단순히 그냥 '움직임'이라고 출제된다면, 그 선지는 이이가 인정할 선지라고 생각하고 풀어야 할 듯합니다. 왜냐하면 올해 수능완성 윤리와사상 문제에 이이가 리의 움직임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는 선지가 출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이: 천리(天理)는 무위(無爲)한 것이므로 기를 타야 움직인다.(O)
- 2023학년도 수능완성 윤리와사상 -
이 선지는 옳은 것으로 출제되었습니다. 즉, 이이도 천리가 움직일 수 있다고 보았음을 EBS 연계교재에서 인정한 것입니다(다만 이런 선지를 출제해 놓고 동일한 책의 다른 문제의 해설에는 이이가 리의 작용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서술한 부분은 명백하게 EBS의 오류라고 볼 수 있겠네요.).
4. 이이 입장에서 '리가 발할 수 있다'는 당연히 아닙니다. '작용'이라는 개념어를 '작위', '발(發)' 등과 혼동하여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 결론: 작용, 움직임 - (O)
능동적 작용, 스스로 움직임,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작용, 운동성, 동정(動靜), 발(發) -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