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주 Jan 18. 2021

'우리 만의' 안온함

같이 살아요. 힘은 별로 없지만 손 내밀게요.

나: "저 오늘 김지은입니다 사러 교보문고 갈 거예요."

어머니: "그게 뭔데?"

나: "그 안희정 전 지사 보좌관이었던 사람이요. 그 사람이 쓴 책."

어머니: "그런 거 읽지 마... 안 읽었으면 좋겠어..."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 개인적인 삶에 불만이 없다.(이렇게 쓰고 나면 꼭 불만족스러운, 불운한 일이 생기긴 하더라만은) 모든 개인은 행복한 상태에 평생 머무를 수 없고, 어쨌든 행복을 '지향'할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대체로 내 삶 속에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내가 불만 없이 내 삶을 산다 해도, 내가 집이 있고 자가용이 있고 직업이 있고, 나의 기쁨과 아픔을 나눌 가족들이 있어도, 방탄소년단이 1분기 몇천억을 벌었고, 우리나라 GDP가 어쩌고 저쩌고, 성장률이 어쩌고 저쩐다고 해도 분명 더 힘든 상황에 처해 누군가의 도움과 연대가 필요한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내 삶이 행복하다고 '이 세상은 정말 살기 좋아'라는 간단한 명제가 성립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진 게 많지도 않지만 그렇게 부족하지도 않은 나는 매일 어떤 걸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올라온다. 오늘 저녁에 주문해도 내일 바로 받을 수 있는 택배, 면봉을 시켜도, 냉장고를 시켜도 바로바로 배송되는 이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이 택배 하나도, 우리 집에 도착하기까지 누군가의 노동으로, 과도한 노동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슬픈 결과물과도 같다.(여전히 배송 노동으로 인한 과로로 죽음을 맞는 노동자들이 있다.) 생각하는 행위를 멈추면 우린 너무나도 쉽게 다른 이의 노동과 시간과 육체를 착취할 수 있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자녀의 안녕을 바란다. 자녀의 행복을 바란다. 어머니와 나눈 위의 대화에서 나는 뭔가 슬픈 감정을 느꼈다. 허구도 아니고, 이미 일어난 사건에 얼굴을 돌리는 우리가 너무 비겁하다고 느껴졌다. 어머니 스스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고 모든 압제와 고통을 겪은 분임에도 어쨌든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있다는 것에 참담함을 느꼈다. 알고 있다. 엄마라면 그럴 수 있다. 내가 엄마라면, 이 세상의 아픔을 내 자식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이타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변화를 원한다면, 특히 더 '나은' 사회를 원한다면 나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이라는 땅에서 서른다섯 해를 살았지만, 장애를 가진 친구도 없고, 성소수자 친구도 없고, 쪽방에 살며 끼니를 걱정하는 친구도 없다. 내가 사는 세상은 딱 그 정도로 좁다. 하지만 내가 보지 않았다고 그 존재들을 지워버리거나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과는 정 반대의, 안정적인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같은 하늘 아래 우리와 꼭 같이 귀한 존재들의 목소리를  쉽게 묵살시킨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이던 2017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 칭했다. 그는 사회 곳곳에서 행해지는 '젠더 폭력'에 더 이상 눈감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유신 헌법 반대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이었고, 노동 법률 사무소 소속의 변호사로도 활동했기에 사회 약자와 소수자의 어려움을 대변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어떠한 정책, 태도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어떤 이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는 비서관을 성폭행한 혐의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안희정의 모친 빈소에 대통령의 이름으로 화환을 보냈다. 문재인에게 안희정은 무엇이었을까. 그 길고 상습적이었던 폭행과 학대가, 그저 똑똑한 녀석이 저지른 한 순간의 실수라고 생각했던 걸까? 문재인에게 김지은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대체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부모들은 자식들이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길 바랄 것이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폭력과 아픔과 학대를 묵인한다면, 아픔을 호소하는 이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대체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떠밀기? 미루기? 외면하기? 적당히 내 삶만 잘 살기? 이미 부모인 사람들에게만 그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매일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수도 없이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고민은 우리가 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날까지 절대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내 콤플렉스는 네가 만든 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