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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Dec 27. 2020

그들이 줄 수 없는 것을 바라다.

86년생 권보아, 나의 우상을 응원하며

 2000년, 내 나이 14살 때 보아라는 신인가수가 데뷔했다. 당시 보아를 두고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많았었다. 에이치오티 오빠들이 벌어온 돈을 보아의 활동으로 탕진한다느니, 이수만한테 잘 보여서 데뷔한 거라느니, 돌아보면 동년배 가수의 데뷔가 배가 아파 지어낸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보아의 데뷔 앨범 테이프를 샀다. 나는 보아의 또랑또랑한 인상이 너무 좋았다. 보아가 너무 예뻐서 좋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학원에 가고, 부모님 심부름을 하고, 그냥 그럭저럭 소소하고 가끔은 시시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뿐이었는데 보아는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고 일본어도 잘했다.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선배 연예인들 앞에서나, 일본 방송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게 활동했다. 부모님이 곁에 없어도,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 재밌게 놀 수 없어도 보아는 항상 웃었다. 나는 점핑보아(보아의 공식 팬클럽 이름)는 아니었지만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보아를 응원했다. 보아의 일본 활동 당시의 노래를 모두 찾아들었고(지금도 여전히 많이 듣는다.), 1시간 반이 넘는 콘서트 영상을 보곤 했다. 우두커니 모니터 앞에 앉아서 너무나도 밝게 빛나던 그녀의 존재에 감탄했고 경이로움을 느꼈다. 보아는 한 명이었지만 무대는 터질듯했다.


그러던 보아가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는다고 했다. 앨범도 나오고 방송도 이따금씩 출연해서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었다. 특히 이수만과 대화를 나누는 유튜브 영상을 재밌게 봤다. 크 큰 회사의 수장이 보아를 존중해주는 모습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그리고 12월 16일에 개인 sns 계정에 보아가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활동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글을 썼다. "보아는 천부적인, 타고난 아티스트면서도 항상 최선을 다하는 아티스트이다.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선 노출, 섹시 콘셉트, 로리타 콘셉트로 남성 팬들에게 어필하지 않았던 게 보아의 롱런 비결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도 했다. 보아의 20년이 기쁘면서도 설리와 구하라를 생각하니 마음이 한편이 아렸다. 다른 어떤 것 보다도 보아가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활동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그리고 12월 17일에 보아가 졸피뎀을 일본에서 무단 반입하여 물의를 빚었다는 기사가 떴다. 갑자기, 가슴이 쿵쿵댔다.


사실, 연이은 여성 연예인들의 자살로 슬픈 마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열심히 일상을 살고 있지만 멀쩡한 척 아무 일 없는 척 해도 혼자 있을 땐 가벼운 우울감이 마음속에 찾아왔다. 나와 같은 시대를 오롯이 "함께" 살아낸 동지 와도 같은, 자매와도 같은 연예인들의 안타까운 소식에 마음이 자주 멍들곤 했다. 같이 살 수는 없었는지, 우리는 왜 이렇게 가혹하게 더 몰아붙이지 못해서, 원하는 걸 더 얻어내지 못해서 안달인지. 그들도 우리와 같은 그냥 "사람"인데.


연예인들은 돈을 까마득하게 많이 벌고 명성을 얻는다는 이유만으로 악플이든 혹평이든 다 당해도 싸다는 식의 관념이 우리 안에 팽배해있다. 우리는 그들의 일상이란 어찌 돼도 상관없고, 당장 내가 보는 화면에서는 항상 웃고, 항상 날씬하고, 항상 귀엽고 이쁘고 건강하고 밝기만을 바란다. 우리는 애정이란 이름으로 한 사람의 인생에 간섭하고 싶어 한다. 남자 친구도 사귀지 말고, 그저 예쁘게 밝게 활동해주기만을 바란다. 뭐, 한 연예인을 좋아하고, 시간과 돈을 쏟아붓는 것에 간섭받을 이유는 없겠지만, 우리는 마치 한 사람을 하나의 물건처럼, 인형처럼, 아바타처럼 소비한다는 것이다.


보아의 졸피뎀 소식을 들었을 때 놀란 것은 맞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10대의 그 어린 나이에 그 어떤 성공도 보장할 수 없는 곳에 가서 활동을 하고 성공을 거두면서, 인간 보아는 어떤 것을 포기하고, 어떤 감정들을 삭여야만 했을까 곱씹어보았다. 사실이든 아니든, 내가 10대 때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보아에 투영하며 그녀에게 큰 짐을 지운 것만 같았다. 우리는 여자 연예인들에게 그들이 줄 수 없는 것들을 바란다. 짧은 치마를 입고 유혹하는 춤을 추고 그런 가사의 노래를 부르길 원하면서도, 남자 친구는 절대 사귀지 않기를 바라고 어떤 슬픔도 우울함도 두려움도 밝은 미소 하나에 다 감추어버리기를 바란다. 우리의 비틀어진 애정이 그들을 아프게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보아를 비롯한 모든 연예인들이 행복하고, 또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기도한다. 그리고 보아가 이 글을 본다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보아 언니 우여곡절 많았던 나의 10대에 오롯이 동행해줘서 고마웠어요, 그리고 지금도 고맙고요. 우리 같이 살아요. 건강하게, 매일 재밌게, 할머니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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