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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Jun 16. 2020

남편의 짝퉁 구찌 양말과 나의 레깅스

 나는 편한 옷이 좋다. 약속이 있거나 교회에 가거나 할 때는 정장을 입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편한 차림을 가장 선호한다. 여름에 가장 많이 입는 옷은 통짜 원피스와 고무줄 바지이다. 통짜 원피스는 허리에 라인이 없으며 어깨선부터 무릎까지 똑 떨어지는 그런 형태의 옷이다. 그 옷을 입고 버스를 타면 임신부석에 앉아있던 분들이 대부분 자리를 양보해 주신다.(쩝) 뭐, 양보받으려고 입고 나가는 것도 아니고, 양보받았다고 앉은 적도 당연히 없다. 정말 편해서 입는다.


 레깅스를 입고 운동을 가는데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타야 해서 너무 신경이 쓰였다. 나는 날씬한 체형이 아니기 때문에 레깅스를 입고 나가는 것 자체가 큰 모험(?)처럼 느껴졌다. 내가 레깅스를 입었다고 신고할 사람도 없고 속으로는 좀 놀랐을지언정 겉으로 불쾌함을 드러내는 사람도 없고 내가 누군가 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레깅스를 입고 집 밖으로 나갈 때만은 내가 세상 쫄보같이 느껴졌다. 나의 쫄보 마인드는 레깅스 위에 커다란 박스티셔츠를 겹쳐 입는 것으로 일단 잠잠해졌다.


 내가 레깅스 한번 입는데도 이리 요란한 사람이라면, 남편은 자신이 무엇을 입든 간에 별로 개의치 않고 타인의 의견이나 시선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다. 남편은 어딘가에서 저렴하게 사온(기억이 잘 안 난다) 구찌, 캘빈 클라인 등의 명품 브랜드의 짝퉁 양말을 열심히 신고 다닌다. 오늘 아침에 물어봤는데 좋아서 신는 건 아니고 그냥 있어서 신는 거라고 했다. 뭐,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사소한 거지만. 그래도... 스펠링이 다른데.


 보시다시피 나의 남편은 무던한 사람이다. 내가 마음에 걸려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괜찮다고 해주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시선, 맞다. 시선! 시선. 시선이다. 이건 시선의 문제이다. 시선은 항상 외부에서 나의 내면으로 왔다. 어쩌면 여성으로서 나는 항상 "~하게"보여야 하는 강박 속에서 자랐다면, 남성으로서 남편은 시선에서 자유로웠을 것이다. 애초에 시선은 남성의 것 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자라면서 겉모습을 평범하게 가꾸어야(?)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꼭 무언이 아니더라도, 여성들은 옷이나 몸에 대한 코멘트를 수도 없이 받는다. 그리고 대개는 그것이 '듣는 사람을 아끼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잔소리'라서 가만히 있어야 된다. 너무 드러낸 옷들을 입으면 '헤프다'라고 하고, 너무 꽁꽁 싸매도 이상하게 본다. 남자들은 옷을 어떻게 입더라도 성적으로 대상화되거나 공격받지는 않는다. 방송에서 여자 연예인들이 남자 연예인들의 복근을 만지기도 하고 잘생긴 얼굴에 집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쇼에 불과할 뿐, 실 생활에서 맘에 드는 남자가 지나간다고 휘파람을 불거나 손목을 낚아채며 번호를 내놓으란 여자는 없다. 


 나는 겉으로는 털털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갈고닦고 괜찮은 상태로 '보이도록' 매번 만들어 내는 그런 예민한 사람이다. 나는 내 행동과 말을 자기 전에 곱씹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표정과 반응을 살피며 내가 어떻게 "행동해 주어야" 상대방이 편안함을 느끼는지를 고민한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튀고 싶지 않다.(INFP의 특성이라고는 하더라만은) 외부의 시선과 내가 보여주고 싶은 혹은 내가 "진짜"라고 말하는 내 "진짜"모습 사이에서 끊임없이 떠도는 것 같다. 34살의 나이이지만, 어른이 되는 것도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어떤 외부의 참견이나 영향 없이 오롯이 선 하나의 인간이 되는 건 힘들다. 한 번에 되지도 않는다. 무튼 레깅스를 힘겹게 낑겨입은 나는, 짝퉁 명품 양말을 신고 "갔다 올게" 하며 아무렇지 않게 나가던 오늘 아침 남편의 무신경함이 참 부러웠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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