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로뉴 비앙쿠르(Boulogne-Billancourt)에서
파트릭 모디아노를 만나게 된 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팔 년 전 즈음인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대학교에서 외국소설 감상이라는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전까지는 희곡과 시나리오에 전념하던 속히 영화광이라 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사촌 형에게 물려받았던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만 속독으로 읽어본 터라, 또한 살아계신 작가들이 아니었기에 공감하기가 힘이 들었고, 그래서 제가 영화로 간 건 아닌 가, 지금에서야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참여한 수업에서는 살아있는 작가들, 제가 그 도시로 가면 만날 수 있는 작가들을 함께 소리 내어 읽었고, 저는 절대로 현혹되지 말아야 할 이 길에, 현혹되어 버리게 됩니다. 폴 오스터, 조너던 사프란 포어, 오르한 파묵, 파트릭 모디아노 등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작가들을 만나게 되었고, 뜨거워지게 되었습니다. 나도 살아있고, 그들도 살아 있다. 그 당연한 진리가 나의 세계를 소설의 세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운이 좋아, 문학기행이라는 곳을 많이 다녀왔습니다. 윤동주의 시를 찾아, 박경리의 소설을 찾아, 이청준 선생님의 생가로, 이효석 선생님의 그 메밀꽃밭으로.
저에게 소설의 장소를 찾아가는 일은 제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는 조금 떨어진, 그러니깐 마치 1cm 정도 어긋난 장소를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그건 저에게 최고의 여행이라 할 수 있는 셈입니다.
대학교 3학년 무렵부터 부산국제영화제를 기웃거렸습니다. 제8회 국제영화제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영화제의 스케줄 상 하루에 4편 정도를 볼 수 있는 시스템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영화에 약간은 미친 상태였기에, 일주일 동안 열리는 영화제에 31편의 영화를 보고 말았습니다. 개막작과 폐막작을 보고 또한 온종일 영화관에 붙어있으면,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31편의 리뷰를 모두 써내어 영화제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영화제에서는 일본으로 다녀올 수 있는 크루즈의 스위트룸을 제공했습니다. 저는 그때 당시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여자 친구 대신 시나리오로 대산 대학 문학상을 받은 형에게 그 표를 제공하여 함께 다녀오게 됩니다. 여자 친구는 당연히 헤어지자고 했습니다만, 아무튼 제가 탄 배는 오사카로 도착했고, 제가 가장 먼저 찾은 장소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의 장소, 킨카쿠지였습니다.
영화제에서 포상을 받아 간 해외여행에서 간 곳이 소설의 장소라니. 어쩌면 그 여행의 선택이 지금의 저를 끊임없이 소설로 이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럽으로의 첫 여행이었습니다. 저는 혼자 파리에 남겨지게 되었고, 5일 정도를 여행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루브르로, 에펠탑으로, 그리고 베르사유와 퐁피두로 달려갔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선택한 곳은 묘지였습니다.
몽 파르나스, 페르 라쉐즈, 몽 마르트르.
이 세 묘지를 전전하며, 저는 보들레르를 만났고, 프루스트와 인사했으며, 사르트르와 조우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곳에 누워 있었고, 누운 채로, 가만히, 저를 기다려주었고, 그리고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제 여행을 묘지를 돌아다니며 쓴 것에 대해 어떤 후회도 없습니다.
2016년 9월, 다시 파리로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미술관도, 묘지도, 공원이나, 센 느강도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조금 지쳐있었고, 넋이 약간은 나간 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매일 밖으로 나가서 삶과 죽음과 그 경계에 대한 것들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았고, 흘러가는 오리 떼를 보았으며, 낮은 구름과 그보다 높은 햇살을 보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힐링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것을 보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순간을 겪으신 분들은 알겠지만, 제법 무섭습니다. 보이는 사물이 실재하는 사물이라는 인식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순간, 그건 소설가의 문장이 됩니다.
제가 머물렀던 곳은 파리에서 북서쪽에 자리한 마을인, 불로뉴-비앙쿠르라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요.
한국의 시인과 소설가들을, 금각사를, 파리의 묘지를 그렇게나 찾아다녔던 저로서는 파트릭 모디아노가 이 거리를 걸었겠구나 하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홉 시 무렵, 저는 홀린 듯 파트릭 모디아노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집요한 구글링 끝에 파트릭 모디아노가 태어난 곳의 주소를 찾아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불로뉴 숲에 인접한 작은 골목에 있었습니다. 집에서는 걸어서 15분가량 걸렸고, 저는 작은 스마트 폰의 불빛에 의지한 채로 숲의 가장자리를 걸어 나갔습니다. 안개가 짙었던가요, 어둠이 깊었던가요, 이러한 기억은 제가 새롭게 만들어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깊은 어둠 때문에 개똥을 세 번 밟았고, 길을 두 번 잃었으며, 되돌아가길 몇 번 반복했습니다. 그야말로 파트릭 모디아노의 문장과도 같은 길을 걸은 셈이지요. 하지만 만약 그 길에 도착하고 나면, 분명 이전과는 뭔가 달라질 거라는 믿음이 제게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파트릭 모디아노의 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정확히는 그가 태어났다는 장소에 도착을 한 것입니다. 그곳은 창살로 울타리를 만들어둔 공동 아파트였습니다. 공동 아파트가 그렇듯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으면 울타리의 문이 열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 시간, 아파트를 드나드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저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지만, 그 기분을 누그러뜨릴만한 어둠이, 또 찬 기운이 저를 감싸 안았습니다. 한 시간 가량,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파트릭 모디아노가 나오길 기다리며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던 때에, 나무 한 그루가 제 시선을 이끌었습니다. 검고 짙은 그 나무는 거의 어둠과도 같았는데, 계속 저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홀린 듯 스마트폰을 들고 나무를 찍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생활 동안 써왔던 저의 폰에는 플래시 기능이 없었고, 나무는 그저 어둠처럼 찍혀버렸습니다. 그때 마침 머릿속으로 떠오르던 생각은,
어쩌면 파트릭 모디아노도 그 나무를 보았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키가 큰 파트릭 모디아노가 아주 어렸을 적에, 나무도 아직 그 키를 가지기 전부터, 둘은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고는 점점 확신으로 차오르게 되었고, 저는 한참이나 나무만 바라보게 되었던 겁니다.
결국, 당연히, 파트릭 모디아노를 만나지 못한 저는 다시 길을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은 왜 그렇게 가깝던지요.
저는 가끔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을 들출 때마다 그 나무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제가 본 그 나무를 떠올릴 때마다 키가 큰 소설가가 아주 느릿하게 문장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