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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은 May 16. 2018

산의 소리

- 그램피언스 국립공원에서


  그는 내게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기타를 연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제야 그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토미, 토미라고 부르렴.”

  그리곤 토미가 말했다.

  “내 기타를 쳐보겠니.”




  그램피언스 국립공원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산이 그리워서였다. 100km 이내에는 동산조차 없으니 고층 아파트에서 멀리 내다봐도 보이는 거라고는 끝도 없는 대지와 장애물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뿐이었다. 하긴, 한국인만큼 산을 사랑하고 즐겨 찾는 사람들이 어디 또 있던가. 봉래산 골짜기에서 뿜어낸 약수를 먹고 자란 나에게 산은 애써 찾아가는 대상이 아닌, 늘 그곳에 있는 당연한 존재였다. 하지만 멜버른에서 산을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발한 지 3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초록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1984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그램피언스는 사암 산맥으로 이뤄져 있어 작은 그랜드 캐년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그 규모는 1,670㎢로 지리산 국립공원의 4배나 된다. 산체가 큰 만큼 종주 코스에 따라서 들판과 저수지와 사막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등산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간과 난이도를 고려하여 3시간 코스를 선택했다. 첫날은 차를 이용하여 그램피언스의 대자연을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산행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가까운 슈퍼에서 맥주를 사 온 이후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 여름 해는 길고 강했기 때문에 6시가 지나도 뜨거운 태양이 사정없이 정수리를 쏘아댔다. 하지만 그늘 아래만 들어가면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산맥의 한기가 더위를 식혀주었다.               


  동네 잔디밭에서는 크리켓 경기가 한창이었는데, 캥거루는 누가 이기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경기장에 누워 햇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러한 풍경이 토요일 오후를 더욱 평화롭게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 평온 속에 속해있다는 사실에 잠시 안도했다. 세상 어느 나라건 도시는 바쁘다. 그 바쁨은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때때로 그건 하나의 물질에서 온다. 철근 콘크리트와 녹색의 풀, 두 물질의 생성과정 자체에서 오는 시간을 비교해 보면, 몇 세기를 걸쳐서도 그 자리를 버티고 있는 산은 그 자체로 우리를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숙소에는 길고 질이 좋은 소파가 ㄷ자 모양으로 배치된 안락한 방이 있었다. 밥을 먹은 후에 배를 만지며 소파에 앉아 있는데, 관리인이 내게 다가와서는 이 방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나가 달라는 것이었다. 비싼 숙박료를 내고도, 예약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소파에 앉을 수 없다는 말인가. 내가 얼굴이 붉어져 대꾸를 하려는데, 프랑스에서 온 친구가 내 등을 두드리며 안정을 시켰다. 그러면서 문에 적힌 쪽지를 가리켰다.   


  오늘 밤 음악회 예정.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가서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았다. 나는 맥주를 홀짝거리면서도 주황색 조명이 아늑하게 비치는 그 방을 힐끗거렸다. 해는 완벽하게 졌고, 풀벌레 소리가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의 연습실처럼 두서없이 들려왔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멀리서부터 보였다. 점점 다가온 그 불빛은 내가 앉은 야외 테이블 가까이에서 멈추었다. 승합차에서는 여섯 쌍의 노부부가 내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 경이로움은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내가 앉았다 쫓겨났던 그 아늑한 방으로 들어가서는 주인과 다정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 방은 그들이 미리 예약해 두었던 것이다.


  그곳은 그들이 오래전부터 이용했던 친숙한 공간으로 보였다. 그들은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고, 소파에 앉기 전에 중절모를 벗어 테이블에 놓았다. 노부인들은 스커트의 주름을 가다듬으며 다리를 모아 앉았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 농담을 했는지 파안대소를 했다. 그들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나는 마치 연극의 리허설을 훔쳐보는 관객처럼 구석에 숨어서 그들이 누리는 그 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곳에서는 굉장한 일이 벌어졌다. 밤기운이 쌀쌀해져 겉옷을 걸쳐 입고 나와 보니, 방의 조명은 살짝 더 어두워진 듯 보였다. 그건 어쩌면 한 병의 맥주를 더 마신 나의 기분 탓인지도 몰랐다. 여섯 쌍의 부부가 자유롭게 각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소파, 테이블, 벽, 옷장 앞, 그리고 바닥에까지. 방은 넓지 않았고, 소파는 열두 명이 앉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앉은 그 방은, 잘 정돈된 정원처럼 조화로웠고, 여유롭기까지 했다. 그들의 손에는 악기가 들려있었다. 여러 대의 기타와 베이스와 트럼펫과 색소폰과 캐스터네츠, 탬버린까지, 그러니까 열두 개의 악기가 그 방에서 잔잔하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비틀스의 ‘Yesterday’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곡만을 듣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어둠 저편으로 허겁지겁 걸어 나갔다. 어둠은 언제나 낭떠러지처럼 당도했지만, 한 발 더 디디면, 또다시 그 위태로움 역시 한 발짝 밀려났다. 그들의 행복이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좌절이었을까, 그 곡으로 인하여 내 마음속에 감춰두었던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기 때문일까. 가까이에서 캥거루가 나뭇잎을 밟고 뛰어다니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지만 그게 캥거루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웜벳이거나, 들개이거나, 오리너구리이거나, 바늘두더지이거나 에뮤이거나. 무슨 동물이건 그건 내가 산에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고, 나는 마음을 조금 더 편히 먹기로 했다. 내게는 아직 올라가지 않은 산이 눈앞에 어둠과도 같이 펼쳐져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애써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다. 친구들은 아직도 맥주를 즐기고 있었고, 나는 변덕스럽게도 마음을 고쳐먹고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노부부의 연주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들 중 몇은 와인 잔을 들고 밤공기를 안주 삼아 천천히 걸어 다녔다. 내가 통나무로 만든 작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배가 제법 나온 할아버지가 다가와선 말을 걸었다. 그는 내가 온 나라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한국은 계절이 이곳과 반대라서 지금은 겨울의 가운데에 있다고 말하자, 그가 이태리도 춥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아들을 보러 유럽을 다녀온 게 한 달 전이라고. 그는 아들이 하는 일과 아들 부부가 선택한 모든 것에 대한 신뢰와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모든 부모의 마음이야말로 순수한 것이라는 생각에 한참을 경청했다. 나는 때를 찾아서는 연주회로 주제를 돌려냈다. 연주회는 1년에 한 번, 이 시기가 되면 어릴 적부터 함께 살던 친구들이 모여서 연주를 하고, 등산을 하는 행사라고 했다. 그는 내년에도 물론 모두가 모이길 기대한다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연주를 잘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기타를 연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제야 그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토미, 토미라고 부르렴.”     

  그리곤 토미가 말했다.     

  “내 기타를 쳐보겠니.”     

  잠시 후 무거운 하드케이스를 가져온 그가 내 앞에서 기타를 선보였다. 그의 표정은 아들 자랑을 할 때보다도 더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74년도 깁슨 기타의 넥과 자신이 직접 만든 기타 바디를 결합시켜놓은 이 예술작품에 경이로움을 표했다. 그 해에 무슨 이유에선가 기타 바디가 부서졌고, 그는 기타를 고쳐내기 위해서 나무를 구하러 다니고 깎고 칠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 기타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기타라는 것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내게 그 기타를 건넸고, 나는 얼떨결에 기타를 받았다. 나는 연주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말없이 내 손가락이 움직이길 기다려주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디선가, 어둠 깊숙한 곳에서 동물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맥주병을 부딪치는 소리가, 나뭇잎이 서로의 몸을 비비는 소리가, 별들이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입꼬리 슬며시 올라가는 게 보였고, 나의 손가락은 그 미소를 지휘 삼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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