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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은 May 09. 2018

내 친구 히로시마와의 마닐라 여행 3

- 울지 않는 닭들과 울어도 들리지 않는 닭 울음의 세계


  피투성이가 된 산타마리아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관계자는 얼른 경기장으로 들어와선 깃털을 쓰레받기에 쓸어 담는다. 비로 모래를 쓸어내자 핏자국은 파도가 모래밭에 찍힌 발자국을 훔쳐가듯 얼른 사라져 버린다. 그곳에 무언가 있긴 했던 걸까.




  1. 레퍼리가 등장하자 장내가 술렁인다. 레퍼리는 마이크의 전원을 켠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잡음이 사람들을 집중시킨다. 싸늘한 공기가 장내를 휘감는다. 그는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며 관객들이 자신에게 더욱더 주목해주길 기대한다. 경기장의 한가운데에서 양발을 어깨만큼 벌려 선 그가 마침내 굳게 다문 입술을 서서히 떼어낸다.


  “장내에 계신 카우보이 여러분, 저희 마닐라 콜로세움을 찾아주신 걸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경기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기장에 입장하는 건 두 마리겠지만 예외 없이 단 한 마리의 닭만이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두 마리의 전사를 소개하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8시간여 버스를 타고 수십 개의 산골짜기를 넘어 마침내 찾은 사냥감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는, 바기오에서 온 수탉 도밍고 카이세도 데 산타마리아!”


  하얀색 타월을 목에 건 사내가 흑갈색 깃털을 가진 닭 한 마리를 품에 안고 경기장으로 입장한다. 휘슬소리, 박수소리 가득하다.


  “이에 뒤지지 않는 또 하나의 전사가 등장합니다. 네그로스 섬의 주도 바콜로드에서 출발해 22시간의 거친 항해를 거쳐 마침내 마닐라의 중심에 도착한 부리가 매서운 용맹한 수탉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이번에는 새하얀 깃털을 가진 우람한 덩치의 닭이 등장한다. 환호 소리는 더욱 커져 열기가 차츰 고조된다.


  “룰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다운된 닭을 심판이 세 번 일으킵니다. 그래도 일어나지 못하면 그대로 경기는 중단됩니다. 과연 누가 이 숨 막히는 승부의 유일한 생존자가 될 것인지, 여러분의 운과 안목을 시험해 보십시오.”


  심판이 마이크의 전원을 끄자 마치 100미터 경주의 총성이 울린 것만 같다.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큰 소리로 배팅을 시작한다. 전광판에는 2:00이라는 빨간 숫자가 뜬다. 닭들이 입장해서 경기장의 흙과 온도를 체크할 수 있는 단 2분 안에 승부사들은 배팅을 해야만 한다. 돈을 많이 걸어야 땄을 때의 이익도 그만큼 커진다. 어차피 무승부란 없다. 50대 50의 확률에서 편법 또한 있을 리 만무하다. 그저 경기장을 돌아다니는 두 마리의 닭이 얼마만큼 기량을 발휘할지 그 짧은 시간 안에 판단해야 한다. 전광판의 숫자가 점점 아래로 떨어질수록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진다. 콜로세움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아수라도의 단면으로 보인다. 세 개의 얼굴과 여덟 개의 팔을 가진, 그곳에 머무는 귀신들의 왕 아수라가 오늘의 승부를 위해서 악다구니를 써 댄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을 노리는 치들도 가득하다. 자신에게 돈을 걸길 바라는 꾼들의 손 안에는 지폐 덩이가 가득하다. 빡빡머리에 하얀 잔털이 난 할아버지가 슬며시 이방인들에게 다가가선 양손을 내밀어본다.


  “오른쪽? 왼쪽? 선택해!”


  그는 이미 두 선수들 모두에게 자신의 돈을 걸어두었고, 그 지분을 관광객들에게 되파는 것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어차피 본전인 배팅에서 거둬들이는 이익이란 중간 수수료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온 한 청년이 재미 삼아 50페소를 걸어본다. 40페소는 배팅 액으로 10페소는 수수료로 떼어간다. 이기면 배팅 액의 갑절인 80페소를 받게 된다. 지게 되더라도 중개인은 10페소를 남겨 먹는 셈이 된다. 중개인은 수수료를 가지고 더블 배팅을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도박이란 이번만은 이길 수 있다는 정체 모를 자신감과 합리화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그는 산타마리아에게 오늘치의 일당을 모두 걸어본다. 그가 이기게 된다면, 오늘 하루는 운이 좋은 셈이다. 내일은 또 어떤 운이 그를 지배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매일같이 콜로세움으로 출근한다. 이건 그의 직장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삶이라고 해야 할까.


  2. 경기가 시작되기 전 닭들은 싸움을 부추기는 닭에 의해 성질이 날 만큼은 난 상태다. 하지만 자신들을 바라보며 열광하는 인간들의 함성소리에 귀가 멍해진다. 다리의 한쪽이 평소와 달리 무겁다. 닭들의 주인은 시합이 시작되기 전, 며느리발톱에 날카로운 칼날을 대어놓은 상태다. 너비 5mm에 길이 10cm인 이 칼날에 오일을 발라 적의 살갗을 쉽게 파고들게끔 해둔 것이다. 차츰 적응이 되어 마치 며느리발톱이 길어져 원래부터 제 몸의 일부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있는 힘껏 날개를 펼쳐 1m가량 날아오르면 상대의 목을 단숨에 쳐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고향을 떠나 먼 길을 굽이돌아 온 마닐라다. 그 동네의 공기는 어떠하냐고, 먹이는 무얼 먹고 사냐고, 그런 것들을 물으며 그저 이 시간을 보내고 싶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인은 산에서 새끼 뱀을 잡아다 줬다고 자랑을 하고 싶기도 하다. 미꾸라지를 먹어본 적은 있는가, 한국에서 수입된 영양 만점인 이를 먹어본 적은, 하물며 달걀을 먹어보긴 했는가, 자네. 하지만 매서운 철창 밖의 눈빛들은 어서 녀석의 눈알을 쪼고, 목에 발톱을 박아 피를 솟구치게 하라고 다그치고 있다. 두 닭은 성급히 상대를 겨냥하지 않는다. 예를 다하듯 한참 동안 시선을 피하며 부리를 놀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단 한순간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결국 이 경기장을 나가게 될 운명은 오로지 자신이어야 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전광판의 숫자가 0:00으로 돌아가는 순간, 경기는 시작된다.


  3. 닭이 난다. 아니 마치 나는 것처럼 보인다. 힘찬 날갯짓을 해대지만 그건 개울가에 앉은 선비의 부채질만큼 효력이 없다. 하지만 목을 세우고 두 다리를 힘껏 뻗어 올리면 닭은 그 순간만큼 제 종족의 기원으로 돌아가 새가 된다. 더 높이 날아오른 그 새는 단숨에 적의 목을 그어낸다. 피가 솟구친다. 사월에 피는 복사꽃처럼 하얀 깃털에 붉은 피가 스며든다. 적의 피가 제 몸에 튀겨지자 재빨리 부리로 눈알을 쪼아 먹는다. 레퍼리가 달려 나와선 바콜로드에서 온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를 멀찌감치 떼어 놓는다. 쓰러진 산타마리아를 한 번 들어 올린다. 다리는 이미 풀려서 곧바로 주저앉고 만다. 두 번, 세 번. 경기는 불과 이십여 초 만에 끝이 난다. 어느새 경기장으로 올라온 산타마리아의 주인은 닭목을 한 손으로 잡아들고 경기장을 나선다. 피투성이가 된 산타마리아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관계자는 얼른 경기장으로 들어와선 깃털을 쓰레받기에 쓸어 담는다. 산타마리아의 피가 사방에 난무하다. 비로 모래를 쓸어내자 핏자국은 파도가 모래밭에 찍힌 발자국을 훔쳐가듯 얼른 사라져 버린다. 그곳에 무언가 있긴 했던 걸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레퍼리가 마이크를 켠다. 새로운 경기가 시작될 참이다. 장내가 술렁인다. 다시금, 싸늘한 공기가 경기장을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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