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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은 May 30. 2018

우울 따윈 집어치우고, 닥터

- 프리미엄 가구공장


“그러니, 주말에는 클럽에나 가서 여자를 꼬셔. 우울 따윈 집어치우고. 닥터.”




  특출한 기술, 유창한 영어 실력, 매력적인 외형이나 그렇다 할 경력도 갖추지 못한 내가 호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온종일 수도꼭지를 바라보며 접시를 닦거나 수염이 잘려 나온 옥수수의 껍질을 벗기는 것, 혹은 파프리카가 가득 담긴 상자를 이리저리 나르는 일 등. 키가 2미터에 육박했던 나의 영어 선생님 매튜는 접시를 닦는 데에 지친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곤 했다.


  “접시가 너라고 생각해.”


  이 허무맹랑한 조언을 고무장갑처럼 끼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애썼다. 내가 접시고, 옥수수고, 파프리카라면, 나는 이러한 일들에 대한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접시가 나에게 준 것은 약간의 급료와 엄청난 피로였다. 이유 없이 부끄러운 나 자신을 향한 한탄과 마음 속 품은 여러 몽상에의 자위, 감각의 파편을 끌어 모으며 아직 살아있노라 긍정하는 행위, 그리고 잠. 유일한 나의 궁여지책이자 도피처,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나는 결심했다. 꿈에서라도 접시가 되어 보기를. 접시가 된다, 나는 접시가 된다, 내가 접시가 된다, 새하얗고, 납작한 접시가 된다, 그리고 접시가 된다. 세상에나, 그보다 더 우울한 일이 있을까. 잠에서 깨어난다.


  특출한 기술, 유창한 영어 실력, 매력적인 외형이나 그렇다 할 경력도 갖추지 못한 내가 호주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 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입사 과정이 궁금하신 분들은 <경계에 선 청춘의 보고 - 한국과 호주 사이에서 주사위를 던지다>를 찾아보시라) 지난 6개월 동안 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을 모자처럼 눌러쓰며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선 공장으로 향했다. 쇠가 달린 가죽 워커를 신고, 형광색 유니폼을 입고, 보안경과 특수 장갑을 낀 채로 날카로운 톱날 앞에 섰다. 내가 담당하는 구역에는 책상과 의자 하나 그리고 프레임을 자르도록 만들어진 10미터가 넘는 기계가 있었다. 설계도면으로 가득한 책상에는 거울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비친 남자의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소설과 음악과 함께라면 어디든 날아갈 수 있고, 펜과 기타라면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다고 나는 믿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던져주고 가는 설계도면을 따라서 알루미늄과 나무의 틀을 잘라내는 cutter, 그게 나의 직업이자 삶이 되었다.


  가구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현장에서 직접 설치하는 직원들(나는 이들을 속편 하게 딜리버리라고 불렀다)은 매일 아침 나에게 와서 원하는 길이의 프레임을 잘라갔다.


  “투 포인트 나인”, “원 싸우전 세븐 헌드레드”, “포티 앤 텐”,


  “투에니 헌드레드 피프티”


  아라비안 숫자가 세계 공용어라는 건 참 다행인 일이지만 그걸 영어로 받아들일 때에는 제법 난처한 경우가 많았다. 다국적 공장답게 억양도 발음도 제각각이었다. 더군다나 이천 삼십 미터를 투에니 써리 미터라던가, 투 제로 쓰리 제로로 바꿔 말할 때면 숫자 입력 버튼 앞에서 잠깐 멈칫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영어도, 딜리버리의 억양도, 그렇다고 아무 죄 없이 잘리기만을 기다리는 높다란 알루미늄 프레임도 아니었다.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 나와 내 몸을 잠식하는 우울, 그것이야말로 나를 목 죄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그 관념 덩어리가 내 몸을 무기력하게 지배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놈의 힘은 대략 십팔 년 전 기타를 만났을 때, 십삼 년 전 처음 희곡을 써냈을 때, 팔 년 전 첫 단편소설을 완성했을 때 더 강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을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두려웠다. 내가 녀석에게 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녀석을 써내거나 녀석을 부르는 일이었다. 그럴 때만이 녀석은 희희낙락하여 나의 몸과 정신을 잠시나마 내버려 두었다. 그러니까 나는, 프레임을 기계 위에 올리고, 투 싸우전 세븐 헌드레드 미터를 입력한 뒤에 방탄 뚜껑을 닫고, 날카로운 톱날을 들어 올려 프레임을 잘라내는 동안에도 녀석과의 사투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닥터, 닥터. 뜨리 따우전 원 헌드레에드.”


  마르셀로 곤도르포 토를레치오. 그가 나를 닥터라 부른 이유는 하얀 마스크 때문이었다. 쇳가루와 톱밥이 날리는 나의 영역에서 마스크는 필수였다. 또한 쇠 자르는 소리는 마치 자동차가 충돌할 때 나는 소리처럼 귀를 찢어놓았기에 귀마개도 필수였다. 모자, 마스크, 귀마개, 그리고 보안경까지. 그가 볼 수 있는 나의 얼굴은 보안경에 비친 눈과 불그스름한 광대뼈가 전부였는데, 그는 늘 웃어주며 나를 대했다. 나이는 대략 사십 대 후반으로 배가 동산처럼 나오고 덩치가 커 무거운 프레임을 나르는 모습이 제법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하루는 이십 대의 젊은 친구를 데려왔는데, 자신의 아들이라고 소개를 했다.


  “나는 아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해.”


  그는 실제로 늘 행복해 보였고, 그건 마치 바이러스처럼 전염되어 나도 마스크를 벗고 치아를 내보이며 웃곤 했다. 나는 그가 편해졌고, 점점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나의 우울한 심경까지 토로하게 되었다. 내가 왜 낯선 나라에서 프레임을 자르며 하루를 버텨내고 있는지, 프레임이 잘리는 톱날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가끔씩 공장 천장의 틈으로 내려오는 햇빛은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러자 그는 순식간에 주름지게 웃던 미소를 숨기고는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칠레를 떠나온 이후로 어머니를 다시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단다. 처음에는 접시를 닦았지. 바다 앞에 있는 레스토랑이었어. 사 년이 지나자 매니저를 할 수 있었고, 결국에는 비자를 따냈지. 벌써 십구 년이 되었어. 성공하면 돌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그만 여기까지 와 버렸지. 지금 나에게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고, 잘생긴 아들이 있고, 이제 나는 여기가 고향이 되어버렸어. 가족이 생기면 너는 조금 변하게 될 거야.”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니, 주말에는 클럽에나 가서 여자를 꼬셔. 우울 따윈 집어치우고. 닥터.”


  그는 나중에 프레임을 찾으러 오겠다며 총총걸음으로 떠나갔다. 나는 그가 두고 간 설계도면을 펼쳤다. 그의 글씨 속에는 그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뜨리 싸우전 원 헌드레에드. 뜨리싸우전 원 헌드레에드. 특유의 스페니쉬 잉글리시 억양에는 그의 십구 년이 담겨 있었다. 나는 십구 년 전에 낯선 나라에 와서 그가 닦아 냈던 접시를 생각했다. 그도 접시가 되는 생각을 해보았을까. 나는 그가 원하는 길이의 프레임을 잘라냈다. 귀마개를 단단히 했는데도, 날카로운 쇳소리가 한참이나 귓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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