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덴버의 ‘Poems, Prayers and Promises’를 들으며
음악은 시간을 교환하여 즐기는 값진 예술이다. 우리는 오 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을 허락하여 귀를 열고 소리를 받아들인다. 어떤 음악은 노르웨이의 울창한 숲 속으로 데려다주고, 어떤 음악은 깊은 밤의 고요 속으로 밀어 넣는다. 때때로 나는 카이먼 제국의 물줄기를 따라 노질하는 할아버지의 고백을 엿듣고, 어떤 날은 선상 파티가 한창인 이비자 섬의 뜨거운 청춘 남녀를 엿본다. 음악은 마음을 달래고, 색을 짙게 만들며, 생을 더듬게 만든다. 어쩌면 음악은 사람을 숙주로 삼은 영리한 생명체 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죽지만 음악은 남는다. 그 자명한 사실 속에서 음악은 역사가 되고 예술이 되고 삶이 되며 하나의 점으로 이루어진 숨이 된다.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는 들을수록 신비한 기운을 자아내는 노래다. 물처럼 흐르는 피아노 연주와 들판에 부는 바람처럼 여린 통기타 연주는 단출하면서도 정직하다. 감미로운 듯 덤덤한 존 덴버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청중을 시골길로 데리고 간다. 웨스트 버지니아 블루리지 산, 쉐난도우 강, 어둠과 먼지로 채색된 하늘, 안개가 낀 듯 한 달빛, 그 고향 길로 데려다 달라는 젊은 가수의 외침은 돌연한 이벤트가 아니다. 그것은 뼈가 자라는 소리를 들은 자의 고백이며, 주름이 접히는 소리를 아는 자의 회환이다. 인생의 저 너머를 엿보는 행위이자 어제라는 과거와의 포옹이다. 돌아가고자 하는 그리움이 노스탤지어라면 자라나는 모든 소리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지 못해 서럽다.
존 덴버는 자신을 지배하는 정신적인 정령을 웨스트 버지니아 마마라고 부른다. 그것은 마마라는 산의 이름일 수도 있고, 광부의 아내였던 자신의 어머니일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자연을 뜻하기도 하고, 또한 버지니아의 산신령 인지도 모르겠다. 이 노래는 삼신 할매 바위, 장산 바위 등이 있는 내 고향 영도로 나를 데리고 가기에 충분하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음악은 그 어떤 타임머신보다 빠르게 우리를 과거로 데리고 간다.
사람들은 한반도 남동쪽 끝자락에 사는 영험한 용이 머리를 기댄 야트막한 언덕을 용두산이라 불렀다. 용이 물장구를 치며 꼬리를 뒤흔드는 바닷가는 항구가 되었다. 길쭉한 몸통이 뻗은 자리로 길이 나고 사람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용이 사는 고장을 지키고자 바다에는 고래가 노닐었다. 사람들은 어미 고래처럼 위용 있는 이 섬에서 조개를 캐고 말을 키웠다. 그림자를 끊어낼 정도로 발 빠른 말들이 산다고 하여 절영도(絶影島)라 부르기도 했다. 어미를 따라 해안까지 들어온 새끼 고래 같은 작은 섬은 다섯 개처럼 보이다가 여섯 개로 보이기도 해 오륙도라고 불렀다. 선사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절영도는 봉래산 맑은 물줄기로 일찌감치 선조들의 터전이 되었다. 이 섬의 신성한 기운을 막고자 일제는 봉래산 곳곳에 말뚝을 박고 물이 고갈되길 기대하는 제를 지냈다. 봉래산은 졸지에 고갈산이라 놀림받았다. 광복이 찾아오고 일제가 물러가자 북한군에 밀린 피란민이 몰려와 실향의 노래가 곳곳에 가득했다. 벼랑 끝에 마을이 서고, 학교가 생기고, 길이 났다. 대한민국 최초의 연륙교인 영도다리에 애환이 얽힌 사람들이 오가기 시작했고 서글픈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84년의 봄,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이십오 년을 살았다. 영도를 떠나 육지로 이사 가던 날, 갖은 전자제품을 싣고 가던 차의 트렁크 안에서 퍽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장 차를 세워 트렁크를 살피려 했지만 보조석에 앉아있던 어머니는 나를 말렸다.
“뒤 돌아보지 마라. 삼신 할매가 노여워한다.”
그 말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나는 마른침만 꿀꺽 삼키고는 액셀레이터를 더욱 세게 밟았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과거를 살피는 일이다. 어떤 음악도 발화와 수용이 동시에 진행될 수 없다. 노래는 늘 가수가 부르고 난 뒤에 들린다. 작가의 글은 쓰고 난 뒤에 읽힌다. 화가의 그림은 그리고 난 뒤에 전시된다. 예술의 발화와 수용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착각, 혹은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 속에는 사실 시간이 숨어 있다. 말하는 행위와 듣는 행위 사이에 숨은, 그 시간에 깃든 사랑이 음악이다. 그것은 배우와 관객처럼 단순하지만 대척적인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끊임없는 갈증과 구애를 호소한다. 그래서일까. 음악은 때때로 아프고, 기쁘다. 슬프고, 신난다. 불안하고 동시에 평온하다. 음악은 뇌가 조종하기 힘든 심장을 아무 때고 주무른다. 음악은 선명하고 흐릿하게 혈관을 따라 솟구치기도 한다. 그러다 귀를 닫으면 음악은 다시 사라진다. 잠시 동안의 환상, 결국 음악은 시간이다.
나는 오늘도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바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주워 담는다. 나는 차차 늙어가겠지만 존 덴버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음악을 듣는 나와 늘 그대로인 음악이라는 단순한 존재의 양상 인지도 모르겠다. LP는 오른쪽으로 돌아가지만 그것은 시곗바늘처럼 되돌아온다. 컨츄리 로드, 그래 존 덴버를 듣느라 하루가 가버렸지만 그건 다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나는 잠시 안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