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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은 Nov 12. 2019

당신은 앨피로소이다

- 내가 LP를 듣는 이유

그렇다, 내가 앨피를 듣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경험 때문인 것이다. 내가 오늘 그들을 여기로 불러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존재하는 노래방 대백과의 찢어진 페이지 같은, 없지만 있는, 있지만 없는, 오래전 멜로디 같은 아름다움인 것이다.



책장 산책


  나는 매일 내 방 책장을 읽어본다. 책장은 본디 그런 용도로 발명되었다. 공간에 대한 효율에서나 시각적인 효과에서나 질서 정연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그 단정하고 정직한 형태에 숨이 막혀올 때도 있다. 책장 안에서 세로로 떨어지는 글자와 색색의 책등은 단순히 그 자리에 꽂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말을 걸어올 때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손길을 기다리는 장난감들의 간절함 같은 것이 깃든 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모든 책들을 동등하게 대하는 건 아니다. 나는 제목을 살피며 몇몇 책들을 꺼내어 펼쳐본다. 메모지나 스티커가 붙은 페이지도 있고,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구절도 있다. 머리말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뒤로 가선 완전히 처음 보는 책들도 있다. 발터 벤야민의 책에는 아끼던 책갈피가 숨어 있고, 김소연의 산문집에는 무슨 이유였는지 만원 지폐가 꽂혀 있다. <마담 보바리>에는 메모가 빼곡하다. <상실의 시대>는 표지가 완전히 뜯어져 있다.


  문득 어떤 책이 손때가 가장 많이 탔을지 궁금했다. 나는 내가 수없이 넘겨보았을 그 책을 찾기로 했다. 나름의 배치와 배열 속에서 내 손가락은 이리저리 망설이다 줄곧 한 방향을 지시했다. 오단 책장의 세 번째 칸은 어떤 맥락으로 정리해둔 건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근대문학의 종언>과 <이동진 독서법>과 <정확한 사랑의 실험>과 <엣센스 영어사전>과 마르크 샤갈과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책이 있었고, 그 옆에는 <노래방 대백과>가 꽂혀 있었다. 나는 내 손가락의 선택을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노래방 대백과


  문청으로 살아온 내가 가장 많이 넘겨본 책이 <노래방 대백과>라니. 이 같은 결론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기타를 연주하기 위해, 대중가요를 부르기 위해 이 책을 펼쳤던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의 1쪽부터 509쪽까지 밤을 새워 넘겨본 적도 있고, 몇몇 쪽은 찢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 목차는 외울 수 있는 정도고, 부록으로 담긴 코드 일람표는 완벽한 주석으로 참고가 되었다. 이 책에는 수백 명의 가수와 작곡가와 작사가의 이름이 담겼고, 출반 시기와 음반사, 심지어 장르와 빠르기까지 표기되어 있다. 코드와 박자, 2절 가사와 멜로디는 말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이 내게 미친 영향은 어떤 책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의자 눈높이에 이 책이 꽂혀 있는 까닭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접혀 있거나 너덜거리는 내지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내가 LP를 찾아 듣고 느끼고 기록하는 건 나만의 <노래방 대백과>를 만들려는 욕심인 건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빠져 지내던 뮤지션을 추억하고 소환하고 불러보는 것, 마치 책장 한 구석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오래된 작가의 옛 책을 꺼내어 먼지를 닦아내는 것, 그리하여 그들을 읽고 느끼고 즐기다 다시 그 자리에, 아니 조금 더 밝고 안락한 환경으로 옮겨내는 것, 누군가 나로 인해 그들을 되살피게 된다면 진정 행복해질 수 있겠다 싶은 것, 단지 그것이다.


오래전 멜로디


  고백하자면 LP를 듣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존경하는 한 시인이 내게 맡긴 수십 장의 앨범이 시작이었다. 한동안 나는 명반들을 방치했는데, 바이닐은 책과 같아서 기온과 습도 등을 고려해야 하며 볕이나 바람에 변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무엇보다 LP는 간간이 펼쳐 속을 드러내 줘야 생명력이 강해지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LP는 사람에 의해 살아남고, 사람은 LP에서 흘러나오는 풍부한 공간성을 선물처럼 전해받는다. 검고 둥근 플라스틱 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벽과 천장이 저만치 밀려나가는 기분을 느끼고야 만다.


  그날그날 달리 듣는 음악은 나에게는 곧 날씨와도 같다. 제프 벡 같은 날씨라니, 이런. 오늘은 위스키를 마셔야겠어. 오, 사라 맥라클란과도 같은 태양이라니, 쳇 베이커 같은 구름이라니. 그들을 턴테이블 위에 올리는 데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그저 손길이 닿는 대로 기분이 내키는 대로 둔다. 시인이 건넨 오래된 소리는 향이나 이미지로 다가왔고 나는 그 물질의 기호 속에 파묻혀 가만히 마음을 주게 된다. 그리하면 간혹 오래전 세상을 떠난 뮤지션이 눈앞에 나타날 때가 있는데, 그렇다, 내가 앨피를 듣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경험 때문인 것이다. 내가 오늘 그들을 여기로 불러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존재하는 노래방 대백과의 찢어진 페이지 같은, 없지만 있는, 있지만 없는, 오래전 멜로디 같은 아름다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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