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칙 코리아 & 스티브 쿠잘라의 ‘Voyage’를 들으며
융합의 시대다. 고집스럽고 독자적인 체제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은 자못 당연한 사실이다. 시대의 흐름을 각성하고 많은 기관과 기업들이 융합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융합형 모델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조화는 배려와 존중이 선행되는 마음에서야 이뤄질 수 있다. 배려와 존중은 타자의 숨과 쉼을 받아들이는 이해심에서 온다. 하지만 섣부른 이해는 오해의 착각이기에 경계해야 한다. 아니, 타인을 향한 이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러한 불가능의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가 바로 사랑이다. 이것과 저것, 하나와 다른 하나, 세계와 또 다른 세계가 만나 융합할 수 있는 그 경계에 사랑이 있다. 나와 당신을 만나게 하는 근본적인 원리가 바로 사랑이 아니겠는가.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융합이 아닌 것이 없다. 일찍이 성공한 융합적 사례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음악이라고 말하고 싶다. 북과 키타라, 하프와 피리, 탬버린과 캐스터네츠, 심벌즈와 리코더, 기타와 피아노, 드럼과 색소폰. 자신의 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악기의 소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합주의 세계야 말로 융합적 인식의 예술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예술가가 협업을 진행해왔고 그 융합의 세계에서 고도한 음악의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이처럼 융합 속에서 나타난다. 음악의 충돌만큼 강렬하고 생경하고 덧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본 적이 없다. 단 하나, 사랑을 빼면 말이다.
1984년 ECM 레이블이 수집한 이 소리 앞에서 나는 음악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발견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와 플루티스트 스티브 쿠잘라의 만남은 그 자체로도 신선한 충격이지만 플래터 위에 바늘을 올려놓고 직접 소리를 경험한 이후에는 절대적으로 수긍할 수밖에 없다. 각자의 분야에서도 장인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공연 여파에 국제 이스탄불 재즈 페스티벌이 조직될 정도였으니 그 위대한 ‘항해(Voyage)’는 비단 앨범 제목에만 갇혀있지 않게 된 셈이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행성에서 반달처럼 뜬 지구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디자인된 이 앨범은 오로지 피아노와 플루트만으로 우주 너머의 감각을 선사한다.
내가 지금 여러 번 바늘을 옮겨둔 곡은 Free fall(자유낙하). 피아노와 플루트의 만남은 제법 구슬프게 마음을 울린다. 중력의 에너지가 마음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긴다. 천천히 가라앉는다.
악기를 대하는 방식도 방법도 서로 다르다. 손가락의 힘으로 해머를 두드리듯 현을 건드려 소리를 내는 피아노는 강약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을뿐더러 열 개의 손가락으로 넓은 음역을 표현할 수 있다. 희고 검은건반의 당당한 울림 사이사이 바람이 일렁이는 것처럼 플루트가 새어 들어간다. 구멍 뚫린 관에 직접 입술을 대어 공기를 진동시키는 목관악기 플루트는 색소폰보다 여리고, 부드럽고, 숨소리가 잘 스미어 클래식 주자로 활동하곤 한다. 하지만 재즈 앨범에서 만난 플루트는 맑았던 그 기운과는 달리 오히려 애처롭게 들린다. 음의 세기가 일정하지 않고, 기분 따라, 마음 따라 변한다. 하나의 곡 안에서 두 악기는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느끼고 있다. 길고 곧은 선이 흐트러지고 흐려지다 돌연 선명하게 솟아오르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흐트러지고 흐려지다 돌연하게 선명해지면 그제야 앓기도 하고, 안기도 하는 것이다. 태양 아래에서 자유낙하하는 마음이 있다면 나는 지금 양 팔을 벌려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 끌어안고 싶다. 혹 같이 떨어지는 건 어떨까. 점점 위태로워지고, 점점 빨라지고, 점점 아려온다. 마음과 마음이 결합할 때가 늘 이렇다.
자유 낙하하는 모든 것이 가지는 위치 에너지는 지면에 닿기 직전이 최대치이다. 닿기 직전, 이 말이 좋다. 재즈란 악기와 악기가 닿기 직전의 음악이라 해도 좋을까. 피아노와 플루트가 극이 다른 자석처럼 멀게 느껴지지만 그래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홀로 존재하는 것의 외로움도 닿기 직전이 최대치가 될까. 나는 떨어지는 나뭇잎을 향해 슬며시 한 발을 내디뎌 본다. 해는 언제나 서쪽으로 진다. 악기에서 흘러나온 음표는 어디로 떨어질까. 어디로 닿을까.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은. 사랑은. 별은, 달은, 그리고 지구는. 영원히 닿을 곳 없이 떨어지는 이 행성에서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