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편지한통 굴러다닙니다_5편>
*이 글은 그저 편지다. 편지지에 담아 보내지 않는 편지. 나의 마음이라는 편지지에 그저 당신을 그려보는, 이기적인 것 중 가장 이타적인 편지다.
나의 글자가 틀려 다시 지웠다 쓸 일 없는, 오로지 편한 상태에서 쓸 수 있는, 편지지의 빈 공간을 채워야 할 것만 같은 눈치를 보지 않아도 괜찮은, 나의 편지.
당신 몰래 쓰는 이 마음들이, 나도 몰래 당신의 복으로 가 닿길.
(때)
대구에서 태어나, 성주에서 살던 어느 시절.
성주에서 다시 대구로 떠나기 전, 그 시절.
스스로를 미워하던 가엾은 나의 시절.
마지막으로 본 순간에서 벌써 12년이 지났구나.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인연에 대해 떠올리는 아름다움 속에 자꾸 뒷목이 간질거리는 네가 떠올라 오늘의 편지를 쓰게 되었어. 그 기억 또한 아름답지,라고 외치지 못한 상태로 말이야. '안녕'이라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지 못해 미안해. 이 편지만큼은 너에게 닿지 않고 평생을 몰래 굴러다니지 않을까 싶어 시작의 예의를 삼가해봤어.
너의 이름과 닮은, 그때의 우리와 닮은 가명, '어린'.
네가 전학 왔을 때 친해지고 싶었어. 예쁘고, 당당하고, 키 크던 너. 내 눈에 너무 멋져 보이던 너. 빠른 속도로 학교에 적응하고, 적응하는 그 사이에 나와도 금세 친해졌지. 2반까지만 있던 초등학교에서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는 것은 나에게 설레는 큰 일이었어. 설렘이라는 감정은 익숙함 보다 빨리 두려움으로 전환되었지만. 이유 모를 왕따는 왜 어딜 가든 유행처럼 생기는 걸까? 너조차도 이유도 모르고 시간이 흐르듯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상황적인 이유를 모르니, 어렸던 나는 스스로의 성격과 외모에 대한 비난을 자주 하게 되었어. 모른다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절이니, 내 멋대로 이유를 내게서 찾는 거지.
그래도 네가 나를 때리진 않아서 참 다행이야. 놀리고, 욕하고, 망신을 주고, 다른 친한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만들던- 그 정도, 딱 내가 버틸만한 정도였어. 모두가 나를 만만하게 보던 시간 속에 나는 바보같이 수긍해야 했어. 그래, 나는 만만하게 봐도 별 수 없지, 라며. 다른 초등학교 친구가 나랑 놀자 했는데, 그 친구조차 내 상황을 어찌 알고 나를 함부로 대했어, 그 아이에게 폭행을 당했던 날, 드디어 나는 받아들였어.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약한 존재라고. 나는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고.
중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에게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고, 학생들과 반은 몇 배로 많아지고, 교복을 입으니 조금 더 어른과 가까워지는 느낌이었어. 욕을 하고, 누군가를 놀리는 행위에 더 이상 지친 듯 보이는 네가 변해 보였어. 조금 덜 말하고, 조금 덜 웃는 듯했어. 나는 조금 더 말하고, 조금 더 웃기 시작했어. 그래서 늘 의아했어.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는 내게 했던 행동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혹시 우리가 친구인 건지.
그리고 내가 전학을 가기 몇 개월 전인가 1년 전인가, 전 학년이 함께 떠났던 야영, 캠프파이어 시간이었어. 나는 너의 모습이 영상은 아니더라도 사진처럼 기억나는데 너는 어떨까 궁금하네. 그때 너의 눈동자와 흘러내리는 눈물 안에 커다란 불이 조그맣게 반짝이는 채로 들어가 있었어. 슥-슥- 그것들을 닦으며 내게 사과하는 너를 보는 나는, 다른 계절처럼 차가웠어. 당시 내 성격은 내 주관이란 없고 모든 걸 다 끄덕이는 소극적인 성격이었는데, 이상하게 너의 사과에는 대답하지 않았어.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행했던 죄에 대한 떨리는 그 고백과 사과에 나는 동행하고 싶지 않았어. 그냥 상처받은 채로 그대로 두고 싶었어. 냉랭하게, 너를 쳐다만 봤어.
살면서 누군가의 사과를 받지 않은 적이 그것이 처음이고, 아직까지도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중이야. 그 뒤로 내 삶에 영향을 끼쳤던 몇 가지의 트라우마들이 늘 숙제였는데 내가 너와 그날 대화 나누길 선택하고 사과를 받아 대답하길 선택했다면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어. 그때 나의 선택이 나 조차도 해석하기 어려우니 말이야.
그래 나는 늘 선택하지 않는 자였어. 주변에서 나를 답답해할 정도로, 내가 원하는 선택이란 없었고 누군가가 원하는 선택이 있다면 따라가는 게 훨씬 편했지. 그런 내가 너의 사과를 받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건 아주 큰 변화의 시발점이었다고 생각해. 그 시기 이후로 내게 처음으로 꿈이 생겼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기로 선택했고, 힘든 일을 맞서기로 선택했고 등.. 어렸을 때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을 일탈하듯 행하기 시작했지.
그래서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밉고 무섭던 네가, 고마워. 결국 사과까지 해주던 네 마음이 결코 미워 보이지 않아. 아무 이유도 모르게 어지러워지던 내 삶이 너의 사과로 인해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어. 너의 사과를 받지 않는 선택으로 인해, 남에게 따라가지 않고 오로지 내가 걸어 나아갈 수 있음을 의도하지 않은 채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어. 너와의 시간이 존재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음에 감사해.
마지막으로 들렸던 소식에 비해 조금은 더 잘 살고 있길 바라며, 편지를 마무리할게- 안녕.
2025.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