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이 나면 자연스레 책을 꺼내 자리에 앉아 독서의 세계로 빠져드는 첫째와 다르게 8살 둘째는 책과는 썩 친하지 않다. 그나마 책과 친해지게 해 보려고 도서관에서 다양한 책을 빌려다 읽히고, 나와 제 언니가 수없이 책을 읽어준 덕택에 책과 친해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고 있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 입에서 스스로 독서록을 써보겠다고 공책을 산다고 하니 두 손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작은 노트에 앙증맞은 두 손으로 연필을 꽉 쥐고 뭔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가 뭔가에 집중해서 몰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엄마로서 느끼는 최고의 기쁨이지 싶다. 뭘 쓰든 보지 않아도 이미 엄마 마음에는 하트 백만 개쯤 아이 한데 쏘고 있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보다 몇 배의 칭찬을 기대하는 아이의 심리를 알기에 노트를 읽기도 전에 나는 이미 칭찬 폭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트를 받아 들고 읽는 순간 굳이 억지 칭찬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아이에게 진심으로 감동했다.
“우와, 엄마 진짜 감동!! 이렇게 쓰는 건 어떻게 생각했어? 독서록 쓰기는 어려운 건데…” 아이는 그 작은 노트에 책 제목을 적고, 간단한 줄거리와 자기 생각을 알차게 적고 그 뒷이야기까지 야심 차게 만들어 써놨던 것이다.비록 맞춤법은 엉망진창이었지만 말이다.
“언니가 쓰는 거 맨날 읽어봤잖아. 그리고 언니 한데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니깐 언니가 알려줬어. 처음에 줄거리를 쓰고 내 느낌을 써도 되고, 이야기 뒷 이야기를 꾸며도 되고, 주인공 한데 하고 싶은 말을 편지처럼 적어도 된데…”
“진짜? 언니 한데 물어봤어? 진짜 너무 멋지다. 희서는 좋은 언니가 있어서 정말 좋겠어. 그지?”
“응 맞아!! 나도 언니처럼 될 거야!”
늘 언니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줄만 알았는데 자존심 강한 아이가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
“그런 걸 롤모델이라고 하는 거야. 내가 따라 하고 싶은 사람. 우리 희서의 롤모델은 언니구나?”
“응!! 언니는 못하는 게 없으니깐 나도 언니처럼 다 잘할 거야.”
우리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큰 딸이 다가왔다.
“제 롤모델은 엄마예요.”
와, 순간 수만 개의 별이 내 앞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늘 묵직하고 진중한 아이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한때 위인전에 빠져서 세계 여러 인물들을 읽을 때마다 자기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며 다양한 꿈을 꾸던 아이였다.
“진짜? 은서 롤모델이 엄마야? 멋지고 훌륭한 사람들 많은데 왜?”
“엄마가 제일 멋져요. 엄마가 잘하는 것도 많지만 늘 잘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더 멋져요. 나도 그렇게 늘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이들 앞에서 늘 부족하고 짜증 많은 엄마 모습만 보여준 것 같은데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 고마웠다. 펜더믹 시기에 아이들과 계속 함께하면서 나름 스스로 무너지지 않으려고 나를 계속 곧추세우곤 한다. 그 방편으로 새벽에 일어나 모닝 페이지를 쓰면서 나를 돌아보고, 영어 공부를 하고, 꾸준히 운동을 하고, 독서를 하며 글을 쓰는 것. 단순하지만 지속해야 의미가 있는 일들을 매일 성실히 해내려고 수면 아래에서 열심히 발차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이 아이 눈에 보였던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롤모델이 된다는 것. 부담스러우면서도 내 삶에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말이다. 지금껏 살아온 것에 크나큰 칭찬을 받는 듯했다. 늘 함께 하면서 내 밑바닥까지 남김없이 보게 되는 가족 구성원에게 ‘롤모델’이 돼주고 있다면 제법 괜찮게 살고 있다는 크나큰 위로였다. 앞으로도 그렇게 열심히 발차기를 하면서 더 멀리 나아가 보라는 응원이었다. 내 딸에게 앞으로도 쭉 롤모델이 되는 엄마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