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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Oct 13. 2021

백일장에서 시를 짓는 소녀처럼

시나브로, 여행자의 자세

중학교 때 '나브로'란 이름의 문예반 활동을 했다고, 나름 문학소녀였노라 수줍게 고백해본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의 순우리말, '나브로'란 이름을 지은 문예반 선생님은 우리가 느리더라도 조금씩 문학을 알아가길 바라는 순전한 마음으로 글 쓰는 것을 응원하셨다. 그런 의미로 매해 문예반에서는 시화전을 교내에서 큰 행사로 준비했다.


20여 명 남짓의 문예반 동기, 선후배들과 시화전 날짜가 정해지기 두세 달 전부터 글감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곤 했다. 선생님은 그 어떤 주제도 좋다고 하셨다. 다만 충분히 보고 느끼고 생각하라는 주문만 하셨다.


시화전을 준비하며 '글감 여행'이란 낭만적 이름을 붙인 우리만의 백일장을 학교 운동장에서 열곤 했다. 그날은 아예 날을 잡아 주말에 우리끼리 모여 교정의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여중생들의 넘치는 감수성은 도처에 널린 들풀과 돌멩이에도  남다른 의미가 매겨지 했다.


히 많은 이들의 글감 중에 하늘과 , 나무가 서로 겹치곤 했다. 그럴 때면 서로 자기들이 먼저 찾은 것이라고 우기며 양보를 종용하는 웃지 못할 사태도 종종 생기곤 했다. 일상의 권태 속에서는 그저 풍경에 불과했던 것들이 '백일장'이란 틀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각자 잠재되어있던 감성과 만나 저마다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 그렇게 나만의 의미를 시로 표현하는 그 낭만에 취해 우리는 매해 지치지도 않고 시화전을 준비하곤 했다.



최종 완성된 시를 짓기까지 수십 번의 지난한 퇴고 과정이 반복됐다. 시구에 어울리는 단어 하나를 신중히 고르고, 문장 배열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꿔보면서 행 하나를 매만지는 수고로움에 때때로 서로 예민해지곤 했다.


시화전은 시만 짓는 일이 아니라 그 시와 어울리는 그림 또한 손수 준비해야만 했다. 가끔은 미술에 재능이 있는 친구의 손을 빌리는 이도 있었지만, 내가 지은 시에 어울리는 그림을 아무리 설명한들  내가 느낀 그대로 상대방이 이해해줄 리 만무했다. 한 땀 한 땀 고이 꿰어낸 나의 시구에 어울릴 그림도 결국 어설픈 나의 손으로 그려내야 진정 ' 나의 시'가 될 수 있었다.




제주 여행 중



범속한 일상을 떠나 늦은 휴가를 제주에서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백일장에서 시를 짓던 소녀의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싶다. 팔레트에 여러 물감을 짜내어 조합을 해봐도 그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제주의 푸른 하늘, 그리고 그와 데칼코마니를 해놓은 듯 펼쳐진 바다, 관광지마다 가을의 정취를 뽐내주는 억새와 핑크 뮬리, 저마다색과 느낌을 뽐내는 모래사장과 그 주변에 무심하게 던져져 있는 갖가지 모양의  현무암들. 그 모든 것이 시의 글감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많은 여행객들이 동일한 풍경과 자연물들을 보고 감탄하겠지만, 나의 시는 나만이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오롯이 나만 느끼는 그것을 눈으로 담고 그에 어울리는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


이제는 나의 시를 점검받을 수 있는 문예반 선생님도 내 곁에 계시지 않는다. 내 인생 속에 지어내는 시는 나 홀로 꿋꿋하게 매만지고 어루만져야 하는 것.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전시하 시는 못될지언정 서투로 다듬고 싶진 않다.


선물처럼 주어진 긴 여행 동안 백일장에서 고뇌하며 시를 짓던 소녀의 마음으로 보내리라. 멋진 시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금악오름에서 큰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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