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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보다 언니가 더 좋은 이유

사랑받는 언니가 되기 위한 조건

by 세리




엄마 지금 배를 탄다고 생각하고 8명을 각해봐.


갑자기 그건 왜?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라고 했거든. 엄마도 해봐 봐


뭘 했는데?


선생님이 배에 8명 태우라고 했거든. 그래서 엄마, 아빠, 언니, 할머니, 외할머니, 이모, 삼촌, 서후를 골랐어.


어 그리고?


그다음에 두 명은 배에서 내려야 한다고 지우라고 했어.


왜?


배에 구멍이 생겨서 다 타면 빠진다고 했거든.


그래서 누굴 지웠어?


서후랑 삼촌 (베프를 이렇게 바로 버려도 되는 거니?)

그다음에 또 두 명을 지우라는 거야. 그래서 할머니랑 이모를 지웠어. 근데 너무한 게 선생님이 두 명을 또 지우래.. 그래서 외할머니랑 아빠를 지웠거든. 그때 막 눈물이 났어. 아빠한테 미안해서..


그리고?


선생님이 이젠 한 명만 두고 한 명을 또 지우래..

엄마랑 언니 중에...



그래서 누굴 선택했어?


엄마, 너무 섭섭해하지 마. 나는 언니라고 했어. 근데 친구들은 다 엄마가 마지막이었거든. 나만 언니였어.

.

.

.

.

그렇구나. 엄마 조금 섭섭하긴 하다.


근데 왜 엄마가 아니고 언니야?





세 살 터울인 자매. 나도 세 살 어린 여동생이 있다. 여렸을 때 기록해놓은 일기장(엄마가 잘 보관해주셔서 가지고 있다)을 들춰보면 초등학교 2학년까지는 동생과 어울려 놀았던 것 같은데 이후로는 나의 세계에 동생을 껴준 기억(기록)은 별로 없다. 고작 세 살 먼저 태어났을 뿐인데 난 원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야의 고수처럼 굴었고, 동생도 나를 놀아달라고 하면 안 되는 사람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깍두기로도 껴주지 않은 매정한 언니였다. 그리고 내가 사춘기를 보내면서 둘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달았고, 동생은 나를 '선생님처럼 잔소리하고, 사이코처럼 지랄하는' 언니로 정의했다고 한다. 우리 둘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내가 대학생이 되고 한참 후. 이후에는 종종 어릴 때 못되게 군것을 서로 웃으면서 회상하곤 했지만 다시 생각할수록 화끈거리는 일이다.


그런 나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둘째 아이가 제 언니를 자기가 구하고 싶은 최후의 사람으로 지정했다고 하니 놀라웠다. 심지어 동생에게 무한 사랑과 신뢰를 얻고 있는 큰아이가 부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둘째에게 집요하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엄마보다 언니가 더 좋아?"


치사하게 보일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동생에게 그런 사랑을 받고 싶은 언니의 심정으로도 꼭 알아야 했으니 말이다.


"아니, 언니가 더 좋다는 게 아니고... 꼭 한 명을 선택해야 했으니깐... 그래서 내가 학교에서 울었다니깐.."


"그래, 엄마도 이해하지. 진짜로 궁금해서 그래. 언니가 왜 그렇게 좋아?"


아이의 대답에 따르면, 3가지 이유가 있었다.





언니는 늘 자신과 짝꿍을 해준단다.


아이는 언니랑 노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다고 말했다. 언니가 좋은 이유를 설명하면서도 언니를 향한 애정을 듬뿍 담아 간질거리는 목소리로 "언니는 진짜 재미있게 놀아줘"라고 말했다. 함께 놀아주는 것. 엄마인 나에게 가장 약한 점이다. 차라리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하루에 몇십 권이라도 신나게 읽어줄 텐데, 아이와 역할 놀이를 하거나 몸으로 노는 놀이를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극한 직업다.


억지로 놀아주니 아이도 엄마랑 노는 것이 재미없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주로 아빠가 아이와 놀아주는 역할을 맡아주는데 노예처럼 부리는 아빠도 배에서 진작에 버려졌으니 놀이에서도 언니는 아빠보다 한 수 위였나 보다. 아빠가 아무리 노력을 한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함께 즐기는 것은 제 언니를 따라갈 수 없었을 터. 자신의 완벽한 짝꿍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행복해하는 아이를 보니, 난 영원히 이 아이들의 온니원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언니는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단다.


아이가 두 번째로 말한 것은 "언니는 내 소원을 들어주거든"라고 했다. 아니, 이 부분은 좀 억울하지 않은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준 것으로 치면 엄마인 내가 훨씬 더 많을 텐데 언니가 소원을 들어줬다니. 그래서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대체 언니가 무슨 소원을 들어주느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언니는 자신의 용돈을 모아서 자기가 먹고 싶은 간식을 엄마 몰래 사준다고 했다. 사실 둘이서 하는 일을 이 엄마가 모르는 일은 없으나 아이는 엄마가 모르는 완전 범죄를 언니와 둘이서 '몰래'했다는 것을 처음 고백한다는 듯 속삭였다. 아파트 상가에 아이들의 꽁냥 놀이터인 무인 판매대에는 엄마들은 질색하는 불량식품들이 가득하다. 그쪽으론 눈길조차 주길 꺼려하는 엄마이니 쉽사리 먹고 싶다고 말하지 못한 간식을 언니는 고작 일주일에 천 원씩 받는 용돈을 털어 자신에게 사주곤 했으니 얼마나 좋았으랴. 물론 알면서도 모른 척 질끈 눈 감아준 엄마의 공은 아이들은 모를 것이다. 아이에게 최고로 손꼽힐 수 있는 히든카드는 바로 아무도 모르게 둘만이 '몰래' 비밀을 공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생을 향한 사랑도 있었겠지만, 큰아이도 동생을 앞세워 엄마 몰래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사 먹는 기회로 삼았을지도.



언니는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준단다.



어째 점점 이유들이 나는 아이에게 도대체 어떤 엄마였나를 생각해보게 했다.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것도 엄마가 아닌 언니라고 하니 이쯤에서는 억울함을 넘어 자기반성으로 이어지게 했다.


아이가 말하기를 언니는 자기의 마음이 어떤지 말로 잘 설명하고, 그것을 풀어주는 방법도 잘 안다고 했다. 쉽게 화를 내고 짜증으로 표출하는 둘째 아이에게 왜 그러냐고 이유를 채근할 때가 있다. 사실 그런 순간에는 아이 자신도 스스로 짜증이 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은데 엄마인 나는 정확히 설명을 하라고 요구하니 아이로서는 더 억울할 때가 많았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 대신 짜증 내는 아이를 달래는 역할을 자처했던 것이 바로 제 언니였다. 큰아이는 동생에게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제시하며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 엄마와 아빠 말에는 파르르 떨며 더 신경질을 부리면서 제 언니가 어찌 구워삶는지 언니 말에는 곧 고분고분해지곤 한다. 한 번은 큰아이에게 대체 동생에게 무슨 귀엣말을 그리 소곤소곤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희서가 원하는 것을 해준다고 하죠."라고 했다. 동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쟤가 원하는 거야 뻔해요 엄마. 먹는 거 아니면 같이 노는 거죠."



작은아이가 태우는 배에서 마지막에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에 섭섭했던 나는 아이의 대답에 순순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보다 언니가 더 좋은 아이의 이유는 분명했고, 엄마인 내가 해줄 수 없는 것을 언니는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신은 당신이 모든 아이들 곁에 있어줄 수 없어서 엄마를 보내셨다고 하던데 나를 잘 아는 분께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서로 언니와 동생을 보내주신 것 같다. 앞으로도 둘이서 최고의 짝꿍으로 곁을 든든히 지켜주길 바랄 뿐이다. 곧 각자의 사춘기가 오면 서로 죽일 듯이 소리도 지르고 싸우는 날도 오겠지. 진정한 단짝은 사랑과 전쟁을 겪은 후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런 순간에도 부디 눈감아주는 엄마가 돼주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결국 나는 기어코 마지막에 아이를 울렸다.

아이가 내게도 물어본, 엄마는 배에서 구조할 최후의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에,


"엄마도 너희들 아니고 마지막엔 내 신랑 구해줄 거야. 엄마의 영원한 짝꿍은 아빠니깐! 흥!!"










덧) 글을 다 쓰고 나니 또 나의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화라도 해서 별일 없느냐고 안부라도 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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