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졸업을 몇 달 앞두고 급작스레 서울로 전학을 왔다. 서울 고등학교 진학에 무지했던 당시 담임 선생님이 엄마에게 빠른 전학을 종용했다. 모두가 무지했기에 누군가 한 사람이 강하게 주장하면 그것이 진실인 양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전학을 왔더니 서울은 거주지에서 오래 살았던 순서대로 원하는 학교에 배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히 서울에서 가장 짧게 거주했던 나는 당시 중학교에서 처음 배정을 해야 했던 엉뚱한 고등학교에 나 홀로 가게 됐다.
그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20분가량을 가서 다시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아슬아슬하게 가파른 언덕 위로 올라가야 했다. 무기력했던 엄마와 나는 전학을 갈 수 있다는 것도 알아보지 않은 채,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이곳에서도 또 다른 희망이 싹틀 것이라 무모하게 믿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고향에서 농협을 그만두고 자영업자로 직업군을 바꾼 아빠 덕에 서울로 상경을 했던 것이고, 당시 아빠의 건강 상태는 가파르게 추락하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우리 집 형편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기론, 의 단서는 내가 어떤 집에 살고 있느냐였다. 당시 우리는 서울 대방동에 고층 아파트 30평대에 살고 있었다. 그 집이 자가가 아닌 전세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나에게 그 집이 아빠의 소유인지 아닌지는 관심 밖이었다. 다만 내가 말끔한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와 당당히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우리 집으로 들어가면 널찍한 거실에 방이 세 칸이 있고, 그중 하나가 내 방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그 안도감은 학교 친구들이 사는 곳과의 비교에서 오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거였다.
내가 배정받은 고등학교는 봉천동에 있었다. 지금은 봉천동이 행정상 이름도 바꾸고 실제로 상전벽해라 불릴 정도로 좋아졌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서울에 그런 동네가 있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다. 차라리 시골 마을은 모든 집이 지붕을 달고 마당이 있는 집이라서 그 모양새로 살림의 빈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서울은 어느 동네에 어떤 집에 살고 있느냐로 빈부의 차이를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멀리서 버스를 타고 오는 학생은 나를 포함하여 몇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학교를 중심으로 봉천동 일대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당시에는 야간 자율학습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야자가 시작되기 전 몇 시간의 자유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친구들과 학교에서 한참 떨어진 도로변에 있던 분식집으로 달려 내려가 떡볶이를 먹고 또 신나게 그 언덕을 올라오면서 그 찰나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가 더 친해질 때쯤, 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들은 떡볶이는 이제 물리니깐 자기네 집으로 가서 라면을 끓여 먹자고 했다. 그렇게 그 주변에 사는 친구들 집을 하나둘 방문할 수 있었다.
학교 주변으로는 아파트가 없었기에 내 친구 중에는 아파트에 사는 친구는 없었다. 대부분 다세대 주택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이나 4층쯤에 살았고, 친구 하나는 반지하에 살기도 했다. 한 친구네 집에 가기 위해서는 학교가 있는 언덕배기 옆으로 더 가파른 산 중턱까지 힘들게 올라가야 했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면 질서 없이 흩어져 뻗어있는 골목들 사이사이로 집들이 빼곡히 있었다. 대부분 따로 대문이 없이 얄팍한 문 하나만 열면 바로 부엌으로 연결됐고, 신을 벗고 들어가면 거실처럼 공용으로 사용하는 안방과 미닫이 문으로 방의 경계를 나눈 옆 방이 자그맣게 있었다. 여러 집을 전전하다 결국은 그 친구네 집으로 정착을 했다. 그 친구네는 늘 비어있었고, 다른 친구들이 자신의 집으로 가는 것을 쭈뼛거릴 때 그 친구는 늘 흔쾌히 먼저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학교가 마치고 저녁 시간이 다 돼서 집에 가도 집은 늘 비어 있었다. 한 번은 부모님이랑 동생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부모님은 일을 가서 늦게 오고, 동생은 어디서 놀고 있겠지. 했다. 처음에는 다시 혼자 찾아오기도 힘들겠다 싶었던 거리가 눈에 선명히 익어가더니 나중에는 우리 집에 가듯 먼저 앞서서 친구네 집으로 곧장 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곳에서 함께 라면을 끓여 먹거나 컵라면을 사서 물만 부어 먹었다. 그것도 점점 물리자 친구가 김치볶음밥을 해주겠다고 했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서 가위로 대충 뭉텅뭉텅 자르고 볶은 다음에 밥솥에서 오래된 듯 보이는 밥을 양껏 넣어 볶았다. 그뿐이었다. 평소 엄마가 해줄 때는 처음에 양파도 볶고, 햄도 잘게 잘라 넣고, 마지막에는 참기름과 계란프라이까지 둘러주었던 것 같은데 친구가 프라이팬 채 갖고 온 김치볶음밥은 진짜 김치와 밥만 볶아져 있었다. 별 기대 없이 친구 셋이 숟가락으로 한 입 먹었다. 입 안에 먼저 새콤하니 알싸한 맛이 퍼지면서 굴러다니는 밥알을 입안에 그러모아 씹으면 씹을수록 달큼한 감칠맛이 더해졌다. 우리는 눈이 동그래지면서 "뭐야, 진짜 맛있어!!"라고 감탄하며 연신 숟가락으로 퍼 입속으로 쑤셔 넣었고, 자꾸 줄어드는 프라이팬의 김치볶음밥을 보면서 조급함에 엉덩이를 들썩이기까지 했다. 그 뒤로 우리는 수업만 끝나면 친구에게 "오늘도 김치볶음밥 해줄 거지?"라고 졸라대며 친구네 집으로 갔다. 거의 날마다 그렇게 친구네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창 식욕이 올라있는 여고생 넷이서 김치볶음밥 한 솥을 먹어댔으니 나중에 그 집 부모님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싶다. 그런데도 한참 동안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늘 푸짐하게 김치볶음밥을 해서 친구들에게 대접했다. 화수분처럼 냉장고에는 끊임없이 김치가 나왔고, 밥솥에는 늘 밥이 한가득하였다.
한 번은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도대체 여기에 뭐가 들어가는 거야?"
친구네에서 맛본 김치볶음밥에 반해 집에 가서 엄마에게 해달라고한 적이 있다. 다른 야채와 햄은 넣지 말고 김치만 넣어서 해달라고했다. 그랬는데 친구가 해줬던 그 맛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에게 꼭 그 비법을 알아내야겠다고 할 참이었다. 처음에 친구는 "비밀이야. 안 알려주지." 했다. 너무 알고 싶어 안달이 났던 나는 친구가 볶음밥을 할 때 옆에 찰싹 붙어서 무슨 마법 가루를 그 안에 넣는지 유심히 들여다봤다. 내가 포기할 생각을 안 하자 친구가 결국은 실토했다. "내 비법은 말이지. 바로 간장이야! 간장 한 스푼!!" 친구가 말한 마법가루는 '간장 한 스푼'이었다. 진짜로 친구는 간장만 딱 한 스푼 밥을 김치에 다 볶은 후에 넣었다. 그러면 마법처럼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는 김치볶음밥이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그 뒤로 나도 김치볶음밥을 할 때마다 간장 한 스푼을 넣어봤지만, 그 맛을 재연할 수는 없었다. 친구는 간장 한 스푼이 비법이라고 했지만, 주부가 되어 진짜 비법은 그 친구네 김치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마어마하게 신 김치. 당시에는 김치 냉장고도 없었으니 허름한 냉장고 안에 한참 동안 묵혀뒀던 묵은지에서 그 엄청난 맛의 풍미를 풍기게 했던 것이라 짐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집에 흔쾌히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넉넉하게 베풀었던 친구의 마음이 더해진 그 김치볶음밥은 당시 지쳐있던 우리에게 선사했던 최고의 음식이었으리라.
당시에도 자신의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중 한 친구는 훗날 대학생이 되어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자신의 집에 데려다준다는 것에 응하긴 했지만, 도저히 자신의 집 앞까지 갈 수가 없어서 그 옆 동네 아파트 입구로 갔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당시 10대를 마감하고 20 대를 준비하던 우리는 점점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자신의 집을 비교하며 판단하기 시작했다. 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가 속한 세계에서 내가 어느 정도 위치에 속하는지를 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선에서 조금이라도 앞으로 가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도, 나의 부모가 사는 곳보다 조금 더 근사한 곳에 살기 위해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깨닫고 있던 때였다. 아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간지대에 끼여서 그저 하라는 대로 공부만 해야 했던 우리에게 그 친구는 자신의 집을 기꺼이 공개했고, 자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을 만들어줬다. 그 친구가 해줬던 김치볶음밥이 그리운 나는 아직도 그 친구보다도 세상을 향해 당당히 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다른 누군가보다 앞선 위치에 줄 서고 싶고, 누가 보기에도 근사한 집에 살고 싶은 이 마음은 나를 어지럽히고 부끄럽게 만든다.
그 친구네 집도, 그 친구가 해준 김치볶음밥도 그리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