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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Dec 13. 2021

이름 석 자를  불러주는 것

여전히 '무엇'이 되고 싶은 우리에게



아이에게 화가 났다는 신호로 이름을 부를 때 성까지 붙여 석 자를 단호한 어조로 부르게 된다.  OOO

아이는 엄마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건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면서 서럽게 울곤 한다. 엄마가 아무리 화가 났어도 자기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싫다면서 울어버리면 화가 났던 내 마음은 도리어 속절없이 약해져버린다. 그 냉정함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노라고, 결국 백기는 내 쪽에서 들고야 만다.


학교에 다닐 때, 출석부를 보고 내 이름 석 자를 부르던 선생님들의 냉랭한 말투에 마음이 서늘해지곤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내 성(成)이 예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아빠가 소공녀 '세라'로 짓고 싶었지만, 한자어를 찾지 못해 대안으로 찾은 '세리'란 이름은 '요술공주 세리'로 불렸기에 좋아했지만, 그 이름 앞에 '권'이란 성이 붙으면 급 투박하고 멋없는 이름으로 전락해버렸다. 흔하디흔했던 '김'이나 '이'를 내 이름 앞에 슬그머니 붙여보면 그리 볼썽사납지 않았는데 내 성을 붙여놓으면 이름 석 자가 통째로 못생겨져 버렸다.




대학에 와서 만난 친구는 내 이름을 부를 때 꼭 성을 붙여 석 자로 불렀다. 그전에는 내 이름에 성을 붙여 부르는 친구들에게 은근한 거리감을 느끼며 섭섭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그 친구가 내 이름을 석자로 불렀을 때는 처음으로 내 이름 석 자가 나와 딱 어울리는 그것으로 들려왔다. 그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와  이름 석 자에 걸맞게 내는 억양이 몹시도 조화로워서 그 어떤 서늘감도, 이질감도 침투할 수 없었다. 친구가 이름 석 자를 불러줄 때마다 그 친구와의 거리도 조금씩 좁혀졌고, 나도 덩달아 그 친구 이름은 꼭 성을 다 붙여서 불렀다.


나와 그녀는 전공도 달랐고, 성격도 달랐고, 살아왔던 배경도 모두 달랐는데 그냥 그렇게 이름 석 자를 불러주는 것으로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네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된 것처럼. 그녀는 내 이름에 빛깔과 향기를 덧입혀 불러줬다.  나는 영문학을 전공했고, 그녀는 미대생으로 도예를 전공했다.


각자 자신의 전공을 탐구해서 어떤 결과물을 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그릇이었음에도 우리는 호기롭게 복수 전공을 선택하며 헉헉대고 있었다. 나는 정치학을, 그녀는 일문학을.  좀처럼 우리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한 채, 두리뭉실하게 떠다니는 구름을 잡아보려 끊임없이 종종거렸다. 손에 잡히는 실체는 없이 신기루를 쫓아다니는 모양새였지만 우리는 둘 다 참으로 열심이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인지도 모른 채, 그저 열심히 살았다. 서로 할 수 있는 것은 함께 두 손을 붙잡고 기도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했고  다시 힘을 내어 잡히지 않는 꿈을 꿨다. 그저 무엇인가가 될 수 있을 거라 무모하게 믿으면서 말이다.


늘 내 이름 석 자를 특유의 억양으로 불러주던 그녀 덕분에 그 시절을 버거웠지만, 벅찬 마음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무엇이 되지 못한 채로 덜컥 결혼을 먼저 하겠다고 친구에게 가장 먼저 고백했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신랑을 알고 있던 친구는 신촌의 허름한 분식집에서 와락 쏟아낸 결혼 고백에 연신 내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댔다. "아우, 권세리, 아우 권세리" 하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데 그 뒷말을 다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전해졌다. 놀랐지만 내 결정을 믿고 지지하겠다는 그 마음이. 그 뒤로 결혼 준비를 할 때 친구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그리고 그 뒷이야기는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한참 뒤에 그녀의 말에 따르면 왜 그 오빠랑 결혼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오빠는... 어린 왕자 같아..."라고 했단다. 서로 배가 아프도록 웃고 또 웃었다. 나는 결혼도 그렇게 구름 위를 걷듯 무모하게 붕붕 떠 있는 상태로 결정했던 모양이다.



내가 결혼하면서 그녀와 한참 멀어진 시기가 있었다. 나는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는 시기로, 그 친구는 외국에서 또 다른 도전을 힘들게 겪어내면서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지났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 이름이 잊히고 아이 엄마로 불리면서 종종 그 친구가 불러주던 내 이름 석 자가 몹시도 그리웠다. 그럼에도 선뜻 먼저 전화를 하지 못해서 홀로 서운했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도 타지에서 외로울 때 자신의 이름 석자를 불러줄 친구가 그리웠을 텐데 우리는 그저 서로 그립고 서럽고를 반복했던 것은 아닐는지.


그 뒤로 그 친구도 결혼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엄마'란 공통분모로 묶이면서 우리는 멀어졌던 시간을 바스락거리는 책갈피 속 가을 낙엽처럼 자연스레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는 내 이름 석 자를 불러줬다. 여전히 자주 얼굴을 볼 수 없는 처지에 있지만 문득 내 이름을 찾고 싶을 때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그럼 역시나 친구는 "야, 권세리!!" 하면서 내 이름 석 자를 불러준다.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되고 싶어 하면서 바지런히 종종거리며 살고 있다고 하소연을 했다. 서로에게 물었다. 대체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이제는 아내이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음에도 왜 우리는 계속 무엇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이리 열심히 사는걸까.  새로운 도전으로 열심히 사는 그녀를 찾아 오랜만에 강남까지 찾아가 만나고 돌아오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우리는 계속 이름 석 자로 불리고 싶은 것은 아닐는지.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이 거창하고 근사한 것이 아니라 그저 각자의 이름 석 자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닐지 말이다. 그렇다면 내 이름 석 자를 불러줄 그녀가 내 옆에 있고, 그녀 옆에 내가 있다면 족한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더 자주 친구의 이름 석 자를 불러줘야겠다.







커버사진: © hannahbusing,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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