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를 출산했을 때 주변에 가까운 친구들 대부분은 결혼도 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육아'는 외계어만큼 낯선 단어였다. 육아가 낯설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배 속에서 나온 아이지만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낯선 피조물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전까지 나는 세상의 모든 의문은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에 육아도 분명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책에 쓰인 대로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놀아주면 아이가 그에 따라 울지 않고 무탈하게 클 거라 믿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책과 현실의 크나큰 괴리감을 절망적으로 체감했다.
당시 아이를 키울 때 나에게 답을 주고 위로를 줬던 것은 책도 아니고, 다정했던 신랑도 아니었다. 바로 함께 아이를 키웠던 동네 언니들이었다. (아이 친구들 엄마 모임에서는 늘 내가 어렸기에 '언니들'이라고 칭했다.) 하루 24시간 온종일, 벌거숭이 아이만 쳐다보며 아이가 웃어주면 안도하고, 울면 어찌할 바를 몰라서 내내 앞섬을 열어둔 채 젖을 물리고 거두기를 반복하는-그 벅차고도 미치도록 괴기한 모순을 함께 하는 동지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됐는지 모른다.
유독 의지했던 언니가 있었다.
당시 우리 부부는 도무지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신혼집을 정리하고 지도만을 보고 덜컥 안양 평촌으로 이사를 갔더랬다. 아이 백일이 지나면서부터 오롯이 답답함을 벗어나고자 다녔던 문화센터에서 만난 언니였다. 울산이 고향이었던 언니도 신랑 회사로 인해 급작스럽게 낯선 동네로 이사를 왔었다. 우리는 거대한 외계를 홀로 떠돌다 드디어 말이 통하는 동지를 만난 것처럼 서로 급속도로 친밀해졌다. 매일 서로의 집을 번갈아 오가며 기나긴 육아 전쟁의 믿음직스러운 아군 역할을 해줬다.
서로가 얻은 육아와 살림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장도 보고, 아이들 문화센터 프로그램도 함께 등록해서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큰일인 것처럼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그러다 언니는 신랑이 외국 주재원으로 발령이 나서 머나먼 아부다비로 떠났고, 그 이후로도 연락을 종종 했지만 지금은 연락을 못 하고 지낸 지 오래됐다. 주재원 생활이 끝나면서 언니네 가정은 다시 울산으로 돌아갔고, 나는 평촌을 떠나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 뒤로도 나는 아이들로 인해서 새로운 이웃들과 쉽게 관계를 맺어갔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가거나 유치원에 가면서 자연스레 모임에 초대됐고, 같은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아이들끼리 친구가 되면서 자연스레 엄마들끼리도 가까운 관계가 형성되어 얼마 안 가 속속들이 집안 사정까지 다 공유하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친밀했던 관계도 해가 바뀌어 아이들이 다른 반이 되거나 아이 친구가 바뀌면 어른들 관계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무엇보다 몇 번의 이사를 반복하면서 나는 이웃 간의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 지속하는 관계로 이어지지 못한 것에 한때는 나의 부족함을 탓하기도 했고, 서로의 마음이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에 가눌 길 없는 슬픔과 허무함이 차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시절 인연들과 몇 차례 이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이웃을 만나는 게 두려워졌다. 결국 또 시간이 지나면 끝날 인연인데 마음을 주고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밀려든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로 인해 자연스레 맺어지는 관계를 먼저 거부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적당한 선을 그어 내 영역 표시를 분명히 하면서 그 선을 넘지 않고, 넘어주지 않기를 바라는 관계를 맺으려 애썼다. 그러나 인간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땅따먹기를 하듯이 정확히 선을 그어 내 영역과 네 영역을 딱 나누면서 균형을 이루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금세 알았다. 내가 그렇게 선을 그으면 상대방은 선을 넘지 않으며 관계를 이어가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느니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을 택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라고 하는 말이 그때처럼 처절하게 와닿을 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대하지 못한 지점에서 내 영역으로 훅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내가 선을 긋는다고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을 만나면서 알았다. 먼저 마음을 열고 가까이 다가와 준 이들의 따스함으로 굳어진 마음들은 한없이 말랑거렸고, 결말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그 순간에 사랑으로 대하는 법을 배워갔다. 그저 일터라고 여겼던 곳에서 만났던 동갑내기 동료 선생님이 진짜 친구가 됐고, 찰나 눈인사만 하는 것으로 관계를 이어가려고 했던 동네 이웃에게 먼저 따스하게 건네 온 연락으로 찐 육아 동지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이들과도 이 시절이 지나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어지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연락이 소원해질 수도 있다. 나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날 불행한 미래를 미리 염려한다.
우리는 그저 한 번에 단 하루만을 부여받아 살아간다. 내일을 말하지만, 그 내일이 오늘이 되지 않는다면 소유할 수 없는 것. 영원을 소유할 수 없는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는 것임을 배우듯, 이웃 간의 관계에서도 바로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해야 함을 배운다.
문득 스쳐 지나간 인연들을 생각할 때 이제는 아픔보다는 그리움이 더 크다. 이웃 간의 관계가 가까워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은 현재의 시점에서 생각하면 진실같이 들리지만, 그들과 함께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생각하면 확실하게 반박할 수 있는 거짓이다. 그들과 함께했었던 그 하루 동안, 그들로 인해 그날을 살아갈 힘을 얻었고, 나도 그들에게 같은 것을 줬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들이 따스하게 건넨 그 온기 덕분에 나는 오늘을 무사히 살았고, 다가올 내일을 맞이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오늘 내 곁에 있어 주는 이웃들을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나눠주고, 좋은 책이 있다고 소개해주고, 문득 잘 지내는지 먼저 안부를 물어봐 주는 나의 이웃들. SNS에서 만나서 취미와 삶을 공유하고, 진심으로 서로를 응원하는 이웃들도 있다. 그들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질문임을 이제는 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를 재단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관계는 아직 관계로 맺어지지 못하고 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지금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기. 오늘 최선으로 사랑한다면 내일 그 관계는 그리움으로 변할 것이고,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충분히 잘 살아온 삶이라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후회 없이 오늘의 사랑을 다 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 되길, 그런 새해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