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 싶은 단 한 사람
피자 한 판에 보통 8조각.
“보통 피자를 먹을 때 몇 조각까지 먹을 수 있나요?”
사람에 따라, 소화 능력에 따라, 선호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오겠지만 나는 20대까지 단연코 미디엄 사이즈로 8조각을 혼자 다 먹을 수 있다고 장담하곤 했다. 내가 그렇게 호기롭게 단언을 하면 보통은 내 몸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 ‘에잇,, 설마..” 했다. 뭐 엄청 마른 체형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피자 한 판을 혼자 먹을만한 체격으로도 보이지 않았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진짜로 피자를 몹시도 좋아했다. 대학 다닐 때는 특정 브랜드의 특정 메뉴에 꽂혀서 매번 그 피자만 먹었다. 친구나 남자 친구가 지겨워하면 종종 여동생을 대동해서 당시 살던 철산역 근처에 있던 피자 가게로 가서 둘이서 라지 한 판을 시켜서 다 먹었다. 물론 동생보다 내가 늘 한 조각씩 더 먹는데 전혀 눈치가 보이지 않았기에 동생을 데리고 갔던 이유도 컸다. 사실 지금은 소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도 했고, 피자 한 조각의 칼로리를 생각하며 자제하지만 여전히 피자를 좋아한다. 내게 처음 피자의 그 경이로운 맛을 알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엄마는 종종 우리가 대전에서 살 때가 가장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아빠와 결혼해서 산골 구석에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곳이 언젠가 물에 잠기는 수몰지역이 될 것임을 아셨기에 두 분은 늘 이주할 곳을 생각해두셨다. 여러 후보지 중에 대전이 최종 낙점됐고, 두 분은 감나무가 있는 마당이 딸린 근사한 2층 집을 장만하셨다. 당시 우리 삼 남매의 학업 때문에 먼저 대전으로 이사를 왔지만 아빠는 계속 고향에서 근무를 하셨기에 두 분은 주말부부를 하셨다.
시골살이를 탈출하고 주중에는 남편도 없이 자유의 몸이 된 엄마는 갑자기 주어진 충만한 시간을 어디에 쓸지 고민했고, 당신이 좋아했던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우는 취미를 택했다. 한식과 양식 조리사 자격증 과정을 배우면서 엄마는 우리에게 연습 삼아 이런저런 낯선 요리를 해주곤 했다. 엄마가 해줬던 최고의 요리를 꼽자면 미꾸라지를 곱게 갈아서 수제비를 넣어 만든 어죽이 단연 으뜸이었지만, 보는 것에서부터 설렘을 안겨줬던 엄마표 쌀 피자를 맛본 순간부터 그 절대 왕좌를 내줬다.
엑스세대인 나도 나름 세월의 격동기를 거쳐왔다고 주장하는 데는 음식 문화의 대변화가 한몫한다. 십 대에서 이십 대를 넘어가던 2000년 초기, 피자헛을 시작으로 프랜차이즈 브랜드가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피자가 한국 사회의 외식 대표 메뉴로 자라 잡았지만, 내가 초등학교 때만 해도 피자는 낯선 신문물이었다. 무엇보다 피자 위에 올라간, 그 허옇게 그물처럼 퍼져있던 모짜렐라 치즈의 정체는 묘연했다.
엄마는 우리에게 직접 피자를 해줬다. 당시 엄마가 배웠던 요리 컨셉은 ‘우리 쌀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음식’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밀가루가 아닌 쌀가루로 피자 도우를 만들었다. 도우라기보단 반죽을 해서 부침개를 부치는 방식이었다. 토마토 케찹과 소고기 다진 것을 함께 볶아서 베이스로 듬뿍 올렸다. 그리고 토핑으로 온갖 야채를 앙증맞은 네모로 다져서 위에 스프링클을 뿌리듯 촘촘하게 뿌렸다. 햄, 피망, 그리고 양파는 꼭 들어가야 했다. 평소에 먹은 기억도 없던 초록 피망이 피자에 들어가는 순간 이국적인 피자의 정체성을 한껏 돋우는 맛을 내줬다.
엄마는 피자를 만들 때는 가스레인지가 아닌 전 부칠 때 쓰던 전기 그릴을 꺼내서 쓰셨다. 주방 바닥에 그릴을 놓고 쌀가루 반죽을 팬 위에 얇고 고르게, 둥근 모양으로 펼친 다음에 그 위에 차례로 소스와 토핑을 정성껏 올리는 과정을 우리도 꼼짝없이 옆에 붙어서 지켜봤다. 가장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눈이 내리듯 흩뿌리는 모짜렐라 치즈였다. 그리고 투명한 뚜껑을 덮은 후에 전기 레인지 화력을 가장 낮게 낮추고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유리 안에서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치즈를 감상했다. 살랑이던 치즈들이 부풀면서 서로 엉겨 붙어 고소한 향을 풍기며 둥그런 피자 전체로 퍼지는 모양새는 봐도 봐도 신기했다. 무엇보다 피자가 완성되자마자 조각을 나눠 들고서 한 입 베어 물면 치즈가 쭉 늘어나면서 느껴지는 그 식감은 그전에 먹었던 그 어떤 음식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뒤로 엄마표 피자는 우리 집에 특별 메뉴로 자리 잡았고, 엄마가 먹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늘 ‘피자’라고 외쳤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또 한 번의 이사로 서울로 왔고, 우리 집 식탁은 엄마표 음식보다 당시 아빠가 운영하던 편의점에서 남은 인스턴트로 대체되는 날이 더 많았다. 엄마가 굳이 힘들게 엄마표 피자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길 건너 상가에는 다양하고 화려한 외식 메뉴들이 즐비했고, 피자도 그렇게 사 먹는 음식으로 바뀌었다. 고된 사울 살이 시절 동안 엄마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날이 많았고, 여유롭게 요리하기는 어려웠다. 그 시절에 엄마는 당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며 찾기 시작했다. 역시나 엄마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요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보조 일로 시작하셨다. 힘들지 않겠냐고 만류하는 자식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뭐든 일을 하는 것이 당신한테는 더 활력이 된다고 재차 말씀하셨다. 그러다 엄마의 솜씨를 알아본 분이 다른 회사 직원 식당의 메인 조리사 일을 엄마에게 제안했다. 일반 식당과 달리 점심에만 요리를 하는 것이라 힘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엄마는 그 제안을 수락했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메인 조리사로 일하고 계신다.
엄마는 그곳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메뉴를 연구하고 도전하신다. 우리에게 처음 낯선 피자를 해주셨던 그때 그 마음으로 여전히 요리를 하는 걸까. 요즘은 유튜브로 찾으면 못할 요리가 없다면서, 좋은 세상이라고 감탄하며 작은 핸드폰으로 요리 영상을 찾는 엄마를 보는 것이 딸로서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 몰두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엄마의 삶을 존중하게 된다. 그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회사에서 힘들게는 안 하는지 묻고 또 물을뿐이다.
고작 우리 네 식구 먹을 음식을 하는 것도 힘들어서 나는 종종 반찬가게와 밀키트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툴툴대는데 매번 다양한 메뉴를 고민하고 연구하며 음식을 하는 엄마는 내게 늘 경탄 그 이상이다. 그 덕분에 철부지 딸인 나는 엄마표 새로운 음식을 종종 맛보고 있다. 중국식 야채볶음, 쿠스쿠스 샐러드, 키쉬, 정통 일본식 카레, 차슈덮밥 등. 외식으로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이색적인 메뉴들을 엄마 덕분에 맛볼 수 있다.(허둥지둥 먹기에 바빠 사진을 찍어놓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마흔이 됐음에도 여즉 난 어릴 적 엄마가 손수 만들어줬던 쌀 피자를 기다리던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엄마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당신의 하루하루를 찬란하게 빛내며 살아가는 엄마를 닮아가길 바라면서 오늘을 살아낸다. 닮고 싶은 단 한 사람. 이제는 엄마의 음식 솜씨를 배워야 할 때가 온 것 같은데도 자꾸 미루고 싶은 이 마음을 어찌할까.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다. 올해는 꼭 엄마표 쌀 피자를 전수받아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반짝이던 그 설렘을 느끼게 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