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친정에 갈 때마다 결혼 전에 사뒀던 책들을 한 번씩 쭉 보게 된다. 신혼집이 작았던 지라 내가 갖고 있던 책들은 대부분 친정 책장에 그대로 두고 갔어야 했다. 그 뒤로도 모조리 옮기진 못했고, 틈틈이 끌리는 책들만 몇 권씩 집어 갖고 오곤 한다. 지난번에 갔을 때 그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책 하나가 초점에 잡혔다.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언제 이런 책을 샀었던가 싶었다. 그날따라 용기를 주는 한마디가 무엇인지 궁금했는지 두터운 책을 들고 와서 무심코 거실 책상에 그대로 꽂아두었다. 그리고 한참을 그 존재를 잊고 살았다. 여러 북클럽에서 읽어야 하는 책, 매일 읽는 원서, 그리고 개인 취향으로 틈틈이 읽는 책들까지 이미 하루에 읽어야 할 책 분량이 분에 넘쳤다.
그러다 오늘, 책장에 먼지를 닦다가 지난번 친정에서 집어온 책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대체 이 책에 왜 이리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이상하다 싶어서 책을 꺼내 책 안쪽을 처음부터 쭉 훑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꽂혀 있던 뭔가가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문화상품권 봉투에 낯익은 필체. 바로 아빠가 쓴 글이었다. 아빠 필체를 보는 순간 이 책이 바로 내가 아빠에게 건네었던 책이란 것이 기억이 났다. 아빠가 늘 누워 있었던 그 시절에 아빠 옆에 늘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바로 그 책이어서 그토록 낯이 익었던 거였다.
아마 그날도 아빠에게 악다구니를 된통 쏟아낸 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 밖으로 나와서 하염없이 걷다가 눈에 보이는 서점에 들어갔고, 당시 베스트셀러 자리에 있었던 이 책의 제목이 마음에 박혔다.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진짜 용기가 되어주는 한마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고, 그런 한마디가 있다면 세상에 힘들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하는 반발심마저 들게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책이 사고 싶었다. 책을 사들고 나와서 느지막하게 집에 들어가서 아빠 방에 슬그머니 놓고 왔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 어둠의 방에 버리듯 던져놓았었다. 내 입으로 할 수 없던 말을 이 두꺼운 책이 대신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려나.
그 뒤로 아빠는 편의점에 갈 때도 이 책을 들고 갔고, 집에서 누워있을 때도 옆에 늘 이 책을 두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가게를 보면서 책을 읽으며 그 안의 내용 중에 일부분을 문화상품권 봉투에 필사하셨던 것 같다.
책 안에서 툭 떨어진 봉투에 적힌 내용은 터키인들이 커피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하며 사랑처럼 달콤하다.”
아빠가 커피를 좋아하셨던가. 생각해 보니 편의점에 갈 때마다 즉석에서 물을 부어 먹을 수 있는 드립 커피를 종류대로 먹어보고 그중 하나가 제일 맛있다고 추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편의점을 지키면서 내 입맛에 맞는 커피나 쿠키를 발견하고선 먹을 때 아주 잠시나마 행복함을 느꼈던 것도 기억이 났다. 또 그리움에 젖는다.
당시 아빠가 용기를 얻은 한 마디를 이 책에서 찾아내셨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당신이 좋아하는 커피에 관해 터키인들이 정의 내린 그 문구가 가장 마음에 드셨을지도. 돌고 돌아 다시 내게로 돌아온 이 책. 억지스러운 제목을 지니고 있는 이 책에 여전히 반발심이 나지막하게 남아 있지만 아빠의 손길로 얼룩져있는 이 책에 애정이 생겼다. 아빠가 다시 내게 건네어준 것은 아닌지. 커피 한 잔과 함께 읽어볼 참이다. 혹시나 나에게는 용기가 되는 보물 같은 한 마디가 이 안에 숨겨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