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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요.

아이와 함께 겪는 사춘기

by 세리



내가 좋아했던 친구는 나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친구가 있었다. 늘 그랬다. 나는 그 친구에게 내 마음의 전부를 주고 있었는데, 그 아이의 마음은 나누어진 파이 중에 딱 하나만 나에게 주고 있었다는 걸 알아채는 그 거지 같은 순간이 늘 반복됐다. 왜 나는 너에게 전부일 수 없는 거야, 난 네가 전부일 수 있는데, 네가 원한다면 다른 친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너만 볼 수 있는데, 너는 왜 고작 파이 한 조각만 선심 쓰듯 내게 주고 있는 거야.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럴 배짱도 없었다. 그 친구를 떠나 또 새로운 나의 전부가 되어줄 이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파이 한 조각으로 만족하자고 날 채근하고 다스릴 뿐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한 조각의 마음씩만 이곳저곳에 주면서 각자가 받는 한 조각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간 큰아이는 학교가 괜찮다고 했다. 성실하고 똘똘한 아이는 제 역량을 최대치로 발휘했고, 그런 아이는 어느 곳에서나 무리 없이 어우러지는 법이니깐 괜찮게 지내는 것은 맞을 것이다. 그러나 괜찮은 것과 즐거운 것은 다른 말임을 안다. 그래서 즐겁냐고 물었다. 잠시 멈칫하더니 네라고 대답했다. 순간 스치는 아이의 표정에서 망설임을 보고 나도 잠시 망설였다. 아이 말의 표상을 한 층 걷어내고 그 내부를 파고 또 파고 싶었지만, 그것이 아이에게 좋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냥 넘기기로 했다.



하루는 정말 즐거운 표정으로 나를 위로했고, 또 어떤 하루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아프게 하기를 반복했다. 그날은 잠자리에 들어갈 늦은 시간이었는데 혼자 밖으로 산책을 갔다 오겠다고 했다. 늦은 밤에 혼자 산책이라니. 이것은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돌아봐달라는 시그널이 분명했다. 네 마음이 어떠한지 말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자꾸 슬픈 마음이 들고 왜 사는지 의미를 모르겠다고 하며 사춘기의 시작을 알린 아이가 자신의 내면을 열어 보여주길 바랐다.


“제 마음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이 속에 두 마음이 서로 자꾸 싸움을 걸고 있는 모양이었다. 외부(부모님, 학교)에서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르고 착한 아이와 착한 아이가 되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아이의 싸움이라고 했다. 자신은 공부를 좋아하고, 성실하고 착한 아이라고 믿고 싶은데 때론 자신은 그런 아이가 되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 또 다른 자신을 인정하면 엄마가 실망할까 봐, 그리고 자신은 좋은 모범생이 아닌 그저 그런 사람이 될까 봐 두렵다고도 했다. 참 복잡한 그 마음을 아이는 엉켜있는 실타래를 조심스레 풀듯 차근차근 풀어냈다. 그 자그마한 마음 안에 그토록 뜨거운 불쏘시개를 품고 있는 아이라니, 이토록 나를 닮은 아이라니. 그저 단순하게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 어쩜 좋을까, 하는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네 마음을 엄마가 이해한다고 하면 믿어주겠니?”


억지로 공감을 하는 엄마인 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두 마음이 갈등하는 그 상태를 누구보다 알고 있기에 엄마가 정말 잘 알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는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정확히 모를 것이라고 했다. 자기도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 표현이 정확한 것 같지도 않다고. 순간 그 마음을 토로할 대상이 엄마인 나이면 가장 좋겠지만 친구 하나가 아이 곁에 있어 준다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너를 이해할 친구가 지금 네 곁에 없는 거지?”


반에 함께 놀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기의 진짜 마음을 나눌 친구는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 아이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어려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도 설명할 수 없는 그 마음을 그저 “힘들어, 짜증 나”라고 말하면서 훌훌 털어버릴 단짝 친구가 없는 것. 그것이 가장 속상한 것일지도. 아이는 늘 자기는 꼭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먼저 방어막을 만들곤 했다. 친구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을 텐데, 그냥 아이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구나 하고 믿는 척했다. 이번에는 그 가면도 벗겨야 할 것 같았다.


“진짜 친구가 필요 없는 거야? 널 좋아하는 친구가 없을까 봐 무서운 건 아니고?”


아이는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들켰다는 것을 알고 순순히 인정했다.


“정말 친해지고 싶은 친구들은 저보다 더 친한 친구들이 있어요. 그 친구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더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아져요.”


아이도 친구가 선심 쓰듯 툭 던지는 파이 한 조각에 상처를 받는 모양이었다. 그냥 그 한 조각을 받고 자기도 한 조각만 줄 수 있는 관계에 만족하길 바랐는데 그러지 못하는 아이였다. 여기부터는 엄마인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없는 것 같아 무력감이 들었고, 아이보다 더 슬픈 마음이 번졌다. 그저 아이를 안아줬다.




나와 똑 닮은 아이의 사춘기가 시작됐다. 내가 겪었던 그 시간보다 더 아프고 슬플 것 같다. 이제 겨우 시작인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아프면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그날은 아이도 울고 나도 울고 함께 울었다. 그리고 아이는 괜찮아졌다고 웃으며 잠자리에 들었지만 앞으로 괜찮지 않을 날이 또 올 것을 안다. 아이 앞에서 우는 엄마, 과연 괜찮은 걸까. 엄마가 흔들리면 안 된다고, 엄마가 중심을 잡고 바로 서야 한다고 하는데 울지 않고 별것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이 단단한 엄마의 모습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도 아이와 다시 사춘기가 시작된 것만 같다.



“내 것인지 노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저쪽으로 전가되었다가 다시 이쪽으로 전가되는 실타래 같은 외로움이, 인생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쏜살같이 지나가고 그 밑바닥에 정제되어 남는 건 외롭고 쓰라린 것……


미안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인생이야, 나의 아가. "


-조해진, <단순한 진심>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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