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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Apr 21. 2022

병을 앓아야 비소로 보이는 것

한 주 동안 진창 앓았다. 딱밤 맞는 순서가 와서 따꼼하게 한 대 맞고 훌훌 털어버릴 줄 알았는데 여운은 생각보다 길었고, 바이러스는 삶의 깊숙한 곳까지 심심찮게 파고들었다. 확진받고 이틀 안에 독한 약으로 금방 나은 줄 알았더니 몸살기가 가시자 바이러스는 목으로 총공격을 해왔다. 무언의 공격자는 목구멍 위까지 차곡차곡 점령하며 목소리까지 앗아가고 숨까지 쉬기 힘들 지경으로 만들었다. 병과 상관없이 평범했던 루틴을 그대로 고수할 수 있을 거라 자부했던 오만이 깨지면서 즉시 침대에서만 며칠 생활을 이어갔다. 다행히 곧이어 확진을 받은 신랑의 증상은 미미해서 집안일과 육아는 그에게 오롯이 맡기고 침대와 한 몸 생활로 맘껏 코로나 환자의 비애를 잔뜩 부렸다.


병을 앓아야 비로소 내가 육신에 갇힌 몸이라는 처절한 실존을 깨닫는 모양이다. 나름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이러스  방에  의지는 눈물  방울보다 연약한 꼴로 전락하게 된다. 연약해진 몸으로 고작   있는 것은 눈을 열심히 굴리며 책을 읽을  있는 전력이라도 내보는 , 그럼에도 집중이 잘되지 않기에 머릿속의 온갖 상념들을 붙잡고 싸우는 일밖엔   없는 처지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아주 사소하고 유치한 것들에 마음이 붙들리고, 별일 아닌 일에도 버럭 짜증과 화가 돋는다.


아프면서 당연스레 내 삶 주변부에 버티고 있던 것 중에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참 좋은 것이 무엇인지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숨넘어가게 긴박한 소설, 신랑의 따스한 손길, 카톡으로 안부를 물어주는 애틋한 지인들, 신선한 음식, 그리고 아이들의 곰살맞은 몸짓. 그중 단연 으뜸이라고 꼽을 수 있던 것이 바로 ‘빛’이었다.




지금 사는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두 달 남짓 되어간다.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곳은 지금 있는 곳에서 6킬로 남짓 떨어진, 똑같은 사각 모양 틀의 아파트였지만 1층이었다. 지금 사는 곳은 23층. 무려 22층 위로 거엉충 올라선 곳에 살게 됐다. 이사를 와야 하는 과정은 험난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겪은 고뇌는 더욱 시시각각 그 모양을 달리하며 나를 괴롭혔다. 돈은 없지만 좋은 집에 살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 솟을 때마다 나는 부끄러웠고, 우아하게 숨기지 못하고 그것을 신랑에게 쏟아내며 불평할 때 내 모습은 더욱 볼썽사나웠다. 되고 싶은 나와 실제의 나의 간격을 깨닫는, 그 모멸스러운 순간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마주해야 했다. 수많은 난관을 헤치며 난 그걸 인정하며 결국 그 간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애썼다. 거창한 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지금 내게 주어진 작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누리며 행복하기로 결단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것의 결론을 내리면서.



© patrickperkins, 출처 Unsplash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바로 23층 집으로 내리 쏟아지는 볕이다. 온종일 집 안 바닥에 몸을 붙이고 지내면서 나를 치유해주는 것이 그 무엇보다 빛이라는 걸 알았다. 전에 살던 1층에서 볕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불평을 가진 적은 별로 없었다. 나란 사람은 불평하는 속도만큼 적응하는 속도도 광속이라 주어진 환경에 쉽사리 기생하며 살 수 있는 동물적 감각을 탑재하고 있다. 그래서 동굴 같은 그 집에서도 큰 불만 없이 지냈다. 빛은 없지만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아도 잔소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최대 장점으로 상쇄하면서. 빛이 없어도 빨래는 건조기 안에서 뽀송하게 말랐고, 빛이 집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내 발로 빛을 찾아 나가면 됐으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침에 해가 떠서 저녁에 지기까지 온종일 빛이 집 안에 머무는 그 감미로움을 전혀 모르고 살았던 몇 년의 시간이 억울할 만큼 빛은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무심한 듯 제 몸을 한도껏 쫙 펼치는 빛의 존재는 바이러스로 혼탁해진 집 안의 공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온종일 함께 붙어있으며 강력한 병의 후유증으로 저마다의 몸살을 앓아대며 짜증 섞인 톤의 목소리가 난무한 우리 집의 분위기가 빛이 주는 너그러움으로 누그러뜨려지는 실제의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참 좋았다. 그 따스함이, 온화함이 그리고 여유로움이.


창밖으로 비추는 태양 빛은 때에 맞지 않게 작렬하여 이상 기온이라고 뉴스에서 떠들어댔지만, 태양이 강렬할수록 유리창 사이로 우리 집에 넘어오는 빛의 향연은 농도가 깊어지며 한층 더 매력 있었다. 그저 고마웠다. 아무 대가 없이 나를 호위해주는 그 빛이. 여전히 욕심이 내 안에 득실대고, 난 더 넓고 좋은 집에서 넓은 창으로 큰 너비의 빛을 받을 수 있는 집에 살고 싶은 욕망덩어리겠지만, 빛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상관치 않고 순전하게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이 버겁도록 고마웠다. 내 안의 온갖 복잡한 감정은 빛이 주는 명징한 생생함에 응축돼 그저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심지어 감사로 나아가게 했다. 언젠가 나는 또다시 이 빛의 호위를 받지 못하는 곳에 머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빛은 내 편임이 자명했다.



아프면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 아프지 않게 되면 이토록 기특했던 감사의 마음이 순식간에 거둬지고 난 또다시 쓸모없는 감정에 휩싸여 욕망하며 살 수도 있겠지. 나를 비추며 내가 괜찮은 존재라고 느끼게 해 줬던 빛에 두고두고 빚진 마음으로 살고 싶은데 말이다.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이토록 오글거리며 감성에 질척거리는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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