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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Apr 29. 2022

하루 동안 받은 세 번의 고백

봄의 마들렌


봄의 마들렌이었다.


밤새 내린 비로 집 앞 공원의 나무들이 연녹색의 총기를 뽐내고 들꽃은 저마다의 빛깔로 숨길 수 없는 관능미를 드러낸 그 순간, 떠오른 기억 하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이 마들렌을 먹었을 때 그 향이 촉매가 되어 과거의 잃었던 시간의 기억을 떠올렸던 것처럼 나에게도 떠오른 기억이라 해두자.




계절은 역시 봄이었고, 10대와 20대 사이에 끼여있던, 거울 속 내 얼굴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지만 내 온몸에서는 피어나는 벚꽃의 수줍음처럼 싱그러운 페로몬이 잔뜩 풍기던 때였다.


난 그날 동시에 세 남자로부터 만나자는 메시지를 받았다. 한 명은 당시 함께 교회에 다니고 있던 친구, 한 명은 독서실에서 인사 정도만 나눴던 친구,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함께 수학학원에 다니고 있었지만, 존재감 없이 공부만 열중했던 범생이 친구였다. 셋 다 내가 사는 곳을 알았고, 공교롭게도 각각 겹치지 않는 시간에 아파트 옆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굳이 날을 달리해서 만날 이유는 없었다.


그때 나는 그 아이들이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몰랐을까. 그렇게 순수하고 맹한 여자아이는 아니었다. 메시지는 사뭇 진지했고, 장엄한 용기마저 풍기고 있었기에 소위 내게 고백이란 걸 할 거란 직감이 있었다. 다만 설레발치며 먼저 설레는 어리석은 마음은 먹지 않으려 도도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예상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들은 그 공원에서 차례대로 내게 고백했다.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고백의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의 그들의 표정들이 분연히 떠올랐다. 지금은 각자 제짝을 찾아 아주 가끔 그들도 나를 기억할지, 앙큼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결론적으로 난 셋 모두에게 즉시 거절했다. 뭐 공부 때문이라는 고상한 이유는 아니었고, 셋 다 나를 설레게 하는 한 스푼의 매력도 풍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조금도 설레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동안 세 남자에게 고백받았던 그날이 떠오르며 이상하게 설렜다. 권태로운 일상대로만 봄날을 보낼 수 없다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공원 산책길에서 만난 모든 풍광이 내게 마들렌의 달콤한 향을 풍기며 과거의 그 순간으로 이동하게 했다.


세 남자의 고백은 극도로 희귀한 꿈과도 같은 연극의 한 무대였음을 현재에 와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에 나는 그들의 고백 이야기를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그 시절에는 그들의 고백을 친구에게 고백하는 게 왠지 부끄러웠다. 도도한 여고생에게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일이라고 치부했던 것이다.



이렇듯 나한테만 의미를 갖는 사소한 장면이 당장 떠오르는 것만도 백 가지는 된다. 한 기억을 다섯 번씩 불러낸다 하더라도 살아가며 오백 번의 아픔은 견뎌낼 수 있을 테다. 그 가운데 하나를 꺼내어 썼으니 여전히 아흔아홉 개 남았다. <별것 아닌 선의> p237



현재에 와서 당시 고백의 장면이 떠오르며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된 것인 양 야릇한 기분에 도취한 것이 부끄럽고 민망했지만 잠시 그 감정을 즐겨도 좋지 싶었다. 비가 온 뒤였고, 봄은 더욱 자신의 관능미를 뽐내고 있었으니 밀도 높은 기억에 취해보는 것도 좋은 순간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일상을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 관능의 봄에 걸맞는 기억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는 마들렌을 오늘도 만들어갈 수 있길, 그래서 미래의 어느 순간에 무대 위의 아름다운 장면을 떠올리며 또 경탄할 수 있길 이 봄에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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