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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May 13. 2022

삶이 글을 넘어선 순간

아이가 준 편지



홀로 애정 하는 브런치 작가님이 쓰신 글 중 한 구절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


'글은 삶을 넘을 수 없다'


글의 문맥상 딱 있어야 할 곳에 박혀있던, 반짝이던 그 구절을 본 순간 나는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글을 쓸 때마다 멈칫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는 것을 문장 하나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말로 하는 것으론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 말로 하는 순간 곧바로 마음이 윤색되어 버렸다. 분명 난 더 거창하고 그럴듯한 본질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막상 말로 꿰어져 나온 문장들은 조잡했고, 상대방에게 와닿지 못하고 튕겨 나오기 일쑤였다. 그래서 '글'을 쓸 때만큼은 마음에 가둬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던 것들을 왈칵왈칵 쏟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이켜 내가 쓴 글을 읽었을 때, 그 속에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글 속의 나는 실제와는 다르게 부풀려지고 그럴 듯한 모습을 갖춘 새로운 인격의 소유자였다. 너는 누구냐. 진실은 나도 알고, 글을 읽는 이도 알 것 같았다. 글이 삶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쓴 글이 민망하고 낯부끄러운 순간들을 마주함에도 나는 글을 쓰고 싶었고, 지금도 쓰고 있다. 아주 가끔은, 정말 가끔은 내 삶이 글을 넘어섰다는 희열을 맛보는 순간을 만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글을 써도 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지위를 자신에게 부여할 수 있다.


삶이 글을 넘어선 순간은 주로 내 본능을 거슬러 내 주위 사람들과 이 세상에 아주 조금이나마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자각을 할 때 발생한다. 기나긴 연휴를 보내고 침대에 늘어지고 싶은 월요일, 내 몸을 일으켜 오랫동안 방치했던 냉장고 청소를 한판 한 후, 그 안에서 보물찾기하듯 찾아낸 재료로 나를 위한 점심을 만든, 그런 순간 말이다. 경건하게 육체노동을 거행했고, 가족을 위해 청소를 했으며, 음식 쓰레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요리까지 해서 우아하게 먹는 그 순간, 나는 삶이 글을 넘어섰다는 안도와 만족을 하는 것이다.



얼마 전 맞이했던 어버이날, 나는 또 한 번의 비슷한 희열을 맛보았다. 그 희열은 나로 인해 발생하지 않고 순전히 아이가 안겨준 것이었다. 열두살 큰아이는 어버이날을 맞아 준비한 선물이라며 나와 신랑에게 각각 편지를 건넸다. 두딸은 평소에도 자주 편지를 써주곤 했지만 이날 받은 편지는 부모로서 내 삶이 글을 넘어설 수도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로 벅찬 감동을 선사해줬다.




최근에 빠져서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박해영 작가님의 <나의 해방일지>. 내향형 사람들의 레전드 드라마로 불릴  있을 만큼  공감을   있는 내용이 드라마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말이 없고(못하고), 회사에서도 겉돌기만 하는 여주인공은 자기 아버지와 일하는 정체 모를 남자에게 '추앙' 하라고 말한다.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단어, '추앙'이라니... 오그라들 법도 하지만 '사랑'보다 그들 사이에 적확하게 어울림직한 단어라고 묘하게 설득당한다.  사람이  좋냐는 회사 동료들의 짓궂은 질문에 여주인공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그 사람은 껍데기가 없어."


진심 없는 허황된 말과 과장된 몸짓이 난무한 인간관계에서 껍데기가 없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어쩌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한 사람을 선망하고, 그런 사람에게 추앙받고 싶은 여자에게 더욱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내 삶과 글의 괴리감에 몸서리치며 스스로 위선적이고 가식적으로 보이는 순간들이 너무도 많아서 도무지 이 껍데기를 어찌 벗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지만 난 지지 않고 계속 쓰고 싶다. 적어도 우리 아이는 날 추앙하며 따르고 싶은 엄마라고 말해주고 있다는 것에 용기를 얻는다. 앞으로도 나는 내 삶이 글을 넘을 수 없다는 막다른 벽에 수시로 다다르겠지만, 또 가끔은 그 벽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마법 같은 순간을 만날 테니까.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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