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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May 20. 2022

도세권, 역세권이 부럽지 않다.

도서관에 길이 있다.


신도시에 살면 좋은 점들이 참 많다. 깨끗한 거리, 정갈한 상가, 길에서 무수히 만나는 어린 아가들, 여유 있어 보이는 젊은 엄마들의 표정 등이 그렇다. 그중 단연 좋은 것을 꼽자면 나에게는 도서관인 것 같다.


 도시에 처음 입주를 시작할 때만 해도 시범단지에 위치한 중앙 도서관이 유일했다. 그러다 도시는 빠른 속도로 고유의 모양새를 잡아가더니 도서관도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와 연결된 이음터 도서관, 공연장 컨셉으로  도서관, 카페와 전시장을 능가하는 인테리어를 갖춘 도서관,  언저리에 위치한  도서관 .  신도시에  손가락을  꼽아  만큼의  도서관이 생겨났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집은 도서관과 가까운 곳은 아니었다. 걸어가기에는 애매하게 멀고, 차를 타고 가면 가깝지만, 주차가 어려운 이유 때문에 도서관은 큰마음을 먹어야 가는 곳이 되곤 했다. 그럼에도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면서 책 구매를 줄이자 결심하니 인당 7권씩, 우리 네 식구가 한 도서관에서 28권씩 빌릴 수 있는 혜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의지를 갖고 열심히 도서관에 다녔다.

 

지금 이사 온 곳은 도서관과 가깝다. 바로 옆 아파트 한 단지만 지나가면 자리하고 있어서 걸어가도 5분 남짓, 자전거를 타면 더 빠르게 쓩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조금 더 멀지만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숲 도서관이  또 하나 생겼다. 이만하면 우리 집도 도세권이라고 불릴 수 있지 않을까. 도세권은 집값 상승 요인에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으나 아이들을 키우는 데는 그 어떤 곳보다 천혜의 환경이다.

집 근처 숲도서관


도서관이 아이들을 위해서만 좋은 것은 아니다. 엄연히 말하면 그 누구보다 엄마이자 한 사람인 나를 위한 곳이기도 하다. 어떤 엄마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곱게 화장하고 가장 예쁜 옷을 입은 후에 카페로 향한다고 한다. 그곳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자신만의 시간을 누리는 것. 듣기만 해도 근사한 시간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을 수 있는 시간, 그리고 공간이 필요하다. 멋진 카페에서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는 것, 좋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하는 것, 일상을 벗어난 여행을 떠나는 것, 소설을 읽고 그 주인공의 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것, 글을 쓰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바로 그런 시간일 것이다.


나는 내 존재를 도서관에서 증명받는다. 도서관에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갓 지어져 깨끗한 도서관에 들어서면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으로 생의 용기를 얻는다. 각자가 있어야 할 곳을 알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그들에게 후광이 비춘다. 그리고 그 빛나는 곳으로 나도 유유히 걸어 들어간다. 온통 둘러싸인 책들 틈에서 나를 부르는 작가들을 발견할 때는 가장 값진 순간이다. 집에 정갈하게 배치하고 싶은 문학 전집 시리즈가 빠짐없이 놓여있는 그 서가를 숨죽여 보고 있으면 고전이 주는 비장함마저 밀려온다. 그리고 우리 아이에게 읽히고 싶은 책을 찾아낸 순간은 엄마로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안도감마저 얻는다. 이런 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가 또 어디에 있을까.


도서관에서 나만의 길을 찾고 있다. 한동안 뒷전으로 밀어놓고 있던 소설을 마음껏 읽는다. 입시 공부할 때 죄책감을 느끼며 읽었던 숨 막히던 압박감에서, 그리고 영어 강사로 원서만을 읽어야 한다는 무거운 의무감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의 유희를 위해 소설을 마음껏 향유한다. 그리고 소설에서 사람을 배우고 인생을 깨닫는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도무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현실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궁리한다.


도서관 안에는 분명한 길이 있다. 책을 펼쳐서 읽는 순간,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평범한 내 일상 너머의 기묘하고 놀라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유의 가지가 뻗어지며 길이 펼쳐진다. 책에는 딱 ‘정답’이라고 하는 답이 쓰여있지는 않다. 다만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진다. 주관식이 아닌 객관식 문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안도감을 주던가.


여전히 이 길인지 저 길인지 헤매고 있지만 수많은 갈림길을 만날 수 있는 혜윰터, 도서관에 가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나는 나의 도서관 붕붕이를 끌고 바구니 가득, 책 28권을 품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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