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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Apr 14. 2021

나의 인생 노래들이여!

40대의 대표곡 찾기



나의 십 대 시절 아이돌은 HOT였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우혁 부인으로 불렸고 함께 무리 지어 놀던 친구 네 명은 각각 다른 멤버의 부인이라 부르며 놀곤 했다. 그렇게 나의 중학교 시절 우리 학교에만도 우혁 부인은 수백 명이었을 텐데 난 진짜 그에게 온니원의 사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 관심과 집중을 쏟아부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우면서도 그때의 그 몰입이 놀랍고 부럽다.


당시 쉬는 시간만 되면 HOT의 여러 부인들은 함께 모여 각자 소장하고 있던 남편들의 사진을 자랑했고, 한마음으로 그들의 노래를 떼창 하며 춤을 추곤 했다. 우리 옆, 한 켠에서는 상대적으로 수가 적었던 젝키의 부인들이 우리에게 지지 않겠노라 목청이 터져라 그들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웃픈 시절이었다.


난 내 신랑을 직접 내 눈으로 꼭 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당시 살았던 대전에서 겁 없이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서울 드림콘서트를 보러 가기까지 했다. 물론 부모님께는 철썩 같이 거짓말로 둘러댔다. 당시 최고 스타였던 HOT는 드림 콘서트의 제일 마지막 순서였고, 우리는 숨죽여 마지막 순서를 기다렸다. 2층에서 무자비하게 침을 뱉던 젝키 팬들의 공격을 다 참아내면서 말이다. 그렇게 영접했던 HOT 오빠들은 내 손가락만 하게 보였지만, 침 세례를 받았던 그 굴욕과 인내의 고통들이 다 씻겨져 가며 내 인생의 참 결혼식을 하는 순간처럼 황홀했다.


나의 십 대는 그렇게 HOT와 그들의 노래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친구, 공부, 사춘기, 십 대의 모든 고민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형적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진정한 나의 우상이었다.



시계추처럼 매일 같은 곳에
같은 시간 틀림없이 난 있겠지
그래 있겠지 거기 있겠지만
나 갇혀 버린 건
내 원한 바가 아니오
절대적인 힘 절대 지배함
내 의견은 또 물거품
내 인생은 정말로 팍팍해

HOT <전사의 후예> 中




20대가 되면서는 god가 좋았다.


HOT를 향했던 뜨겁고 열정적인 사랑은 아니었다. 이젠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게 낯부끄러운 짓임을 느끼면서 가수보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좋았다. 노래 가사에 공감했고, 같은 세대인 그들의 분위기에 취했다. 노래방 가서 대학 친구들과 god 노래를 부르며 서로의 인생을 응원했고, 우리의 미래는 찬란할 것이라  서로 위로했다.


그들의 노랫말은 온갖 경쟁으로 치여 녹록지 않았던 여대생의 삶에 희망의 노랑 풍선을 쏘아 올렸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기만 한 지
누가 내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한 건지
태었났을때부터 삶이 내게 준건 끝없이 이겨내야 했던 고난들뿐인걸
그럴 때마다 나는 거울 속에 나에게 물어봤지 뭘 잘못했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내게만이래
달라질 것 같지 않아 내일 또 모레
하지만 그러면 안돼 주저 앉으면 안 돼
세상이 주는 대로 그저 주어진대로.
.........
포기할 텐가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고 말 텐가
세상 앞에 고개 숙이지 마라
기죽지 마라 그리고 우릴 봐라

god <촛불 하나> 中




난 20대 중반에 이승환 노래를 좋아하는 신랑을 만났고, 이승환의 "화려하지 않은 고백" 이란 노래로 청하는 그의 프러포즈에 덜컥 응했다. 정말 화려하지 않은, 초라 그지없는 우리들 형편에 결혼은 가당치도 않은 사치였음에도 우리는 20대의 낭만에 취해 무작정 인생의 가장 큰 과제를 후닥닥 치르고 말았다. 그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사랑만 허락된 시절이었다.


우리는 더없이 그 사랑에 취했고, 충분히 화려했다.


그리고 난 30대가 되면서 바로 엄마가 됐다.

큰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의 30대의 노래는 아이가 좋아하는 뽀로로와 코코몽 주제곡이 돼버렸다. 날마다 아이에게 동요를 불러주고, 함께 만화를 보며 그 힘겨운 육아 시절을 버틸 수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도 분명 어른의 노래들을 자주 듣고, 라디오도 종종 커놓곤 했는데도 나에게 기억은 '뽀롱뽀롱 뽀로로', 끊임없이 반복되던 그 후렴구만 떠오른다.


이제 큰 딸은 로로는 유치하다고 하는 10대에 들어섰고, 더 이상 아이들은 나와 함께 만화를 보자고 하지 않는다. 내 아이들도 이제 자신만의 10대 시절 노래를 찾아 나설 때가 된 것이다.



이제 내년이면 마흔에 접어든다.


문득 훗날 나의 40대 돌아봤을 때 어떤 노래가 떠오를까 궁금해졌다. 가수 하나로, 혹 노래 한 곡으로 내 인생의 주요 시절들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을 보면, 노래가 우리 삶에 얼마나 강력한 힘을 펼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40대의 노래는 무엇이 될 것인가.


최근에 신랑이 뜬금없이 가정용 노래방을 통 크게 질러서 설치를 했다. 도통 자신을 위해 큰돈은 잘 안 쓰는 사람인데 갑자기 웬 노래방인가 싶었다. 그는 나보다 먼저 40대를 살아가는 선배이다. 뭐 특별히  남다를 것 없이 주어진 삶에 최선으로 순응하며 나이만 먹는 사람 같았는데, 그에게도 뭔가 다짐이 생긴 모양이었다.


"이제 나 좋아하는 노래 한 곡쯤은 열심히 연습해서 제대로 부를 수 있어야겠어!"


그러고 보니 정말 가사를 온전히 외워서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노래 한 곡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토록 좋아했던 HOT와 god의 노래들도 멜로디만 맴돌 뿐. 떼창 하며 외웠던 메모리들은 뽀로로의 후렴구와 섞이면서 안드로메다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늘 노래방에서 가사를 보며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던 것이 익숙한 세대인지라 그냥 맨몸으로 노래를 부르려니 도통 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야심 차게 노래방 기계가 설치되자 신랑에게 일단 내게 프러포즈했던 곡부터 먼저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언제가 그대에게 준 눈부신 꽃다발
그 빛도 향기도 머지않아 슬프게 시들고
꽃보다 예쁜 지금 그대도 힘없이 지겠지만
그때엔 꽃과 다른 우리만의 정이 숨을 쉴 거야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말없이 약속할게
그대 눈물이 마를 때까지
내가 지켜준다고
멀고 먼 훗날 지금을 회상하며
작은 입맞춤을 할 수 있다면
이 넓은 세상 위에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대만을 사랑해

이승환 <화려하지 않은 고백> 中



진정 노래 가사처럼 20대의 꽃보다 뻤던 내 모습은 사라지고 있지만 내 눈물을 닦아주는 신랑이 여전히 곁에 있다.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나서 다시 근사하게 노래를 불러주는 이 사람을 보면서 나의 30대가 멋지게 저물고 있다는 마음에 먹먹한 감동이 밀려왔다.


더 근사한 40대를 맞이할 수 있는 노래 한 곡을 찾아봐야겠다. 그 곡을 열심히 듣고 멋지게 부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나의 40대도 꽤 기억에 남을만한 화려한 시절로 자리 잡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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