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조심스레 "혹시 올해 몇 살이세요?"라고 물었을 때, "70년생이에요." 라며 태어난 년도를 말하는 이들이 있다. 소싯적에 그들의 답을 들으면 즉각적으로 나이 계산이 되지 않았다. 나의 모자란 수학능력이 이렇게 일상에서도 치명적인 오류를 만드는 가 싶어서 짜증이 확 일었다. 그리곤 속으로 '아니 왜 나이로 말을 안 하고, 년도로 말을 하는 거야?" 고 상대방에게 그 화를 돌리곤 했다.
그랬던 내가 요즘 누군가 내 나이를 물으면, "83년생이에요."라고 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대답을 바로 내뱉고 나서 나 스스로도 화들짝 놀란다. '아니 그토록 싫었던 짓을 나도 하고 있다니...' 그런데 내 나이가 되고 보니 예전에 그들에게 나이를 물었을 때 왜 출생 연도로 대답을 했는지 불현듯 깨달아졌다. 거기에 나이를 물었을 때 그 얼굴에서 얼핏 스쳤던 불쾌함의 표정을 30대 후반이 돼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서른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 나도 내 나이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헷갈린 것이 아니라 인정하기 싫어서 무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고 살았던 걸지도. 누군가 내 나이를 물을 때야 진짜 내 나이를 다시 꼼꼼히 계산해보게 됐다. '내가 올해 38살이 맞는 거지?' 스스로 되물으면서 말이다. 그러니 그냥 속 편하게 "83년생이에요"라고 년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올해 2021년이 들어서면서 난 내 나이를 헷갈리지 않는다. 한국 나이로 정확히 '39'살이 됐기 때문이다. 내년이면 마흔이란 그 무시무시한 입구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은 아무리 망각을 하려고 해도 도저히 잊히지 않는다.
그래도 난 올해 누군가가 내 나이를 물으면 "83년생이에요"라고 대답할 것 같다.
엄마에게는 아래로 이모들이 셋이 있다. 엄마만 아빠를 만나서 전라도 시골로 시집을 왔더랬고, 나머지 이모 셋은 잘 나가는 도시 총각들을 만나서 다들 서울에서 화려하게 살고 있을 때가 있었다. 엄마가 스물여섯에 나를 낳았고,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이모들의 존재감을 정확히 자각할 수 있었다. 시골에서 아이 셋과 시어머니를 건사하는 나의 엄마와 다르게 고급진 멋스러움을 잔뜩 뽐내던 이모들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엄마 나이는 서른 넷이었다. 당시 막내 이모는 외갓집에서막둥이로 태어났고, 엄마와는 정확히 12살 띠동갑었다. 그때 이모 나이는 22살, 말 그대로 어여쁜 꽃다운 나이였다. 그 막내 이모가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될때쯤 결혼을 해서 바로 내 사촌동생을 낳았다. 그 뒤로 한참 시간이 흘러 나의 찬란한 20대 시절을 정신없이 보내고 한참 후에 이모를 봤을 때 이모는 그녀의 마흔을 바로 목전에 두고 있었다.
막내 이모는 어릴 적 내게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 20대 이모는 그녀의 존재만으로 주변을 다 화려하게 물들였던, 내게는 지금의 블랙핑크 제니 같은 존재감을 뽐냈던 것이다. 한 번은 이모와 단 둘이 기차를 타고 서울에 놀러 갔던 적이 있었는데, 좌석을 못 구해 입석으로 가던 우리에게 한 청년이 자리를 양보했던 기억이 난다. 동네 마을버스가 아닌, 2시간이 넘는 거리를 가야 하는 기차내에서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줬던 것은 어린 내가 가련해서가 아닌, 예쁜 이모의 미모 덕이란 것을 그 청년의이모를 향한 눈빛을 보고 나는 바로 알아챘다.
그런데 내가 20대의 딱 기차 속 그녀의 나이가 됐을 때, 이모는 마흔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모의 나이 듦을 드문드문 지켜보면서 난 세월의 공평함과 황망함을 몸소 체득했다. 그토록 눈부셨던 이모 주변의 빛깔들이 점점 무채색으로 희미해져 가는 것을. 팔레트의 선명한 색들이 다른색들과 섞이면서 혼탁해지는 것을 보는 듯 애잔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나에게는 부디 마흔의 나이가 다가오질 않길 간절히 바라고 바랬다. 간절히 바란다고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었기에 그저 내가 했던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행동은 내 나이를 언제부턴가 기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내년의 마흔을 앞둔 이 지점에서 내 나이는 나 자신에게 아주 또렷이묻고 있다.
"네 나이가 몇이라고?"
이 질문은 마치 "지금 넌 누구냐고?"라는 나의 정체성과 삶을 관통하는 직격탄적 물음과도 같다.
그래서 난 서른아홉과 마흔의 경계에 선 지금, 회피하고만 싶었던 내 나이와 내 삶을 마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마흔을 마주하는 내 삶의 자세도 제대로 정해서 똑바로 앉아보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이 어떠한 모습이든, 서른아홉 해를 잘 살아가는 있는 나를 보듬으며 그토록 마주하기 싫었던 마흔과 반갑게 인사하며 그 입구를 들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