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 불려진 첫 시작
전염병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고립된 생활은 기약 없이 이어졌다. 돌밥(돌아서면 밥)의 연속으로 지루한 일상이 이어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날마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블로그 챌린지로 매일 글을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는다고 누가 쫓아와서 혼을 내는 것도 아닌데 바투 악착같이 1일 1 피드를 올렸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해야 하는 아이들도 지겹기는 매한가지였다. 지겨워하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하는 챌린지를 알리고 함께 해주기를 부탁했다. 블로그 챌린지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지만 두 아이는 그저 매일 엄마에게 쓸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에 바짝 긴장했다. 도무지 나오지 않는 글감이 아이들에게는 무한히도 샘솟았다. 자신들이 그리는 그림을 소개하라고 열심히 그림을 그려줬고, 둘이 레고를 만들어 영어로 역할 놀이를 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두 딸은 내 블로그의 두 배우이자 프로듀서 역할까지 훌륭하게 해냈다. 자신들이 하는 것들이 기록으로 남겨지고 그것을 본 누군가가 인터넷에 댓글을 달아준다는 것을 퍽 신기해했다.
“엄마 오늘은 이웃이 몇 명이야?”
“엄마, 오늘 조회수는 몇이야?”
시간이 지나자 두 아이는 블로그 이웃수와 조회수까지 날마다 체크하기 이르렀다. 아이들에게 엄마표 영어로 너희들이 하는 모든 것들을 블로그에 기록한다고 허락을 받으면서 이웃이 1,000명이 되면 축하파티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블로그 이웃 1,000명은 머나먼 동경이자 나의 1차 목표였다. 블로그 이웃을 늘리는 것은 다른 SNS에 비하면 쉬운 편이라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다. 나와 같은 키워드로 블로그를 하는 블로거를 찾아가 ‘서로 이웃’을 신청하는 부지런함만 있다면 이웃수는 빠르게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블로그를 시작할 당시에는 그런 요령도 몰랐기에 블로그 이웃 1,000명은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막연하게 엄청나게 큰 숫자일 뿐이었다.
이제는 굳이 이웃수를 늘리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이웃이 많았으면 했고, 날마다 내 블로그를 방문해 주는 이들이 많기를 바라는 마음이 글을 쓰는데 큰 동기를 유발했다. 무엇보다 내 블로그의 주연인 두 아이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렇게 100일 동안 매일 글쓰기에 도전했고, 챌린지에 성공했다. 그사이에 서로 이웃을 하고 싶은 블로그도 부지런히 방문해서 이웃수를 늘리는 데 애를 쓰기도 했다. 챌린지에 성공하고 얼마 있지 않아 드디어 이웃수 1,000명을 돌파했다. 그날 나의 두 배우는 플래카드까지 만들어 블로그 이웃 1,000명 돌파를 거하게 축하해 줬다. 블로그에 신명 나게 글을 쓰며 팬데믹의 광풍을 우리는 영리하게 통과하는 중이었다. 남편도 옆에서 지켜보며 날마다 꾸준히 글을 쓰는 나를 격려하고 대단하다고 추켜세워 줬다.
100일 챌린지의 가치는 블로그 이웃 1,000명 돌파도 있었지만 내가 진짜로 글을 쓰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해 준 것에 있다.
오랫동안 글쓰기를 잊고 살았다. 어릴 적 고향에서 혼자 일기를 쓰며 꿈을 키웠던 일, 거센 사춘기의 방황을 문예반에서 시를 쓰며 잠재웠던 일, 고등학교 도서관에 처박혀 나 홀로 소설을 읽으며 몰래 작가의 꿈을 키우던 때의 글쓰기를 잊고 있었다.
나에게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것도 같았다. 수능 점수에 맞춰 영문과에 들어가 몸에 맞지 않는 옷에 나를 꿰맞추느라 영어와 씨름하는 기간이 길었다. 다행히 좀처럼 내 몸에 맞지 않았던 영어도 엄마가 돼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는 조금씩 내 스타일로 리폼할 수 있는 실력까지 다다랐다. 그렇게 내 몸에 겨우 맞춘 영어를 공부하는 것도, 아이들과 엄마표 영어를 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글쓰기’였다.
마흔이 다 돼서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명하게 깨달은 것이다. 허탈함보다는 기쁨이 컸고, 아쉬움보다는 기대를 갖기로 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고 후회하기에는 아직 남은 인생이 더 길었다. 이제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았으니, 앞으로 남은 것은 그것을 충만하게 누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제는 내 글쓰기의 주인공이 두 아이가 아닌 ‘내’가 되자는 마음이 들었다.
블로그는 기록하기에 최적의 플랫폼이다. 간편하게 짧은 글과 사진으로 정보성 글을 작성하고 타인의 방문을 유도하기에도 최적이다. 그러나 블로그에 쓰는 글들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정보성 글로 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쓰는 글도 나만의 스타일로 쓸 수 있었기에 즐거웠지만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해 보자고 생각하자 블로그란 공간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엄마표 기록을 시작했던 글쓰기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들었다. 엄마로서 아이들 이야기를 쓰는 것도 의미 있었지만 결국은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갈망이 커졌다. 블로그에 짧은 에세이 형식으로 코너를 만들었지만 뭔가 부족함이 들 때였다. 이웃의 블로그에 방문했다가 ‘브런치 작가가 되는 법’이란 포스팅을 보게 됐다. 그때까지도 브런치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
브런치가 뭐야?! 밥 먹는 거 아니고?
브런치는 블로그보다 폐쇄적인 플랫폼으로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었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작가’로 선정돼야 했다. 어랏, 아무나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아니란 말이지. 곧바로 앱을 깔고 들어갔다. 브런치에 작가로 선정된 이들은 자기만의 페이지에서 본인의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난 글들을 쓰고 있었다. '바로 이곳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표 기록으로서 글쓰기가 아닌 본격적인 나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공간을. 신춘문예 등용문을 통과해야만 작가란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작가’라고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당장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웃분이 올려놓은 포스팅을 정독하니 브런치에서 작가로 선정되는 것은 만만치 않은 과정인 듯했다. 어떤 사람들은 몇 수씩 재도전하지만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이는 3일 만에 합격 통지를 받았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일주일이 넘어서야 보내준 메일에는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당신을 작가로 모시기 힘들게 됐습니다. 다음에 다시 도전해 주세요.’란 씁쓸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고 했다. 괜스레 더 작가가 되고 싶도록 목마르게 만드는 것에는 가히 성공적인 홍보 효과였다. 간절하게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었다. 이곳이라면 신명 나게 글쓰기로 놀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그동안 가보지 못한 새로운 놀이터를 발견했을 때의 기대감이랄까.
곧바로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다. 그간 블로그 챌린지로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었기에 글을 쓰는 것의 두려움은 사라진 상태였다. 어떤 주제로 브런치 작가로 도전할지만 정하면 됐다. 당장 나의 이야기로 글을 쓰고 싶다고 했지만 어떤 이야기를 쓸지, 어떤 목차를 만들 수 있을지 막막했다. 그럴 때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로 먼저 구성해 보는 것이 좋다. 브런치 작가를 도전할 때 주제를 정하고 글의 목록을 정하지만, 그것은 이후에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동안 다른 플랫폼에 글을 써왔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글 목록을 만들 수 있으니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나는 학원 강사가 엄마표 영어에 도전한 이유에 관한 주제로 목록을 잡아보기 시작했다. 단숨에 글 꼭지가 20개도 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에세이 두 개도 곧바로 써 내려갔다. 그동안 블로그에 짧은 호흡의 글만 적으면서 채워지지 않았던 목마름이 사라지는 듯했다. 고작 브런치 작가 도전을 위한 샘플 글쓰기였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나를 소개하는 글, 쓰고 싶은 주제와 목록, 그리고 에세이 샘플 3편을 적어서 작가 신청을 했다.
브런치 작가로 한 번에 통과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글을 다 작성하고 선정 버튼을 누르는 순간 ‘합격’이 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근거 없는 혼자만의 자신감이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강력한 확신이 들었다. 그동안 매일 글쓰기를 하면서 다져온 내공의 힘을 자만한 것인지, 브런치를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행히도 나의 예감은 적중했고, 삼 일 후에 받은 메일에서 “축하합니다. 당신을 작가로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란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뛸 듯이 기뻤다. 나에게 ‘작가’란 호칭을 붙여준다는 것에 환희가 밀려왔다.
브런치는 블로그와 성격이 다르다. 브런치는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긴 호흡으로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다. 요즘 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는 독자를 기대하기 힘들다. 나의 경우에도 검색창에 내가 필요한 키워드를 입력해서 연관 블로그에 들어가면 쭉 스크롤하다 필요한 정보만 딱 채집해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블로그를 작성하면서 그런 방문자들이 대다수라는 것을 알았기에 글을 쓰는 것에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브런치라고 다를까 싶었다. 상대적으로 브런치는 이용하는 이용자 수가 적다. 나만 해도 브런치란 이름을 들었을 때, 아침에 엄마들이 만나서 먹는 브런치가 생각났을 뿐, 글을 쓰는 공간이라는 것을 한참 후에 알지 않았는가. 브런치를 구독하는 이용자는 적지만 각자의 취향으로 신중하게 작가를 구독한 경우라면 작가의 글을 진중하게 탐독해 주는 곳이라고 생각됐다. 그래서 블로그처럼 구독자수가 눈에 띄게 늘거나, 본인의 노력으로 늘릴 수 없다는 한계도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더 큰 매력이 되는 곳이다.
작가란 호칭을 달아준 브런치에 애정을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짧게 써야 한다는 압박 없이, 사진이 더 중요하다는 사진 찍기의 압박 없이 그저 글만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글 놀이터에서 신명 나는 놀이가 또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