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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Oct 06. 2023

브런치, 스토리가 되다

비밀의 방 통과하기

아이들과 함께 우리 가족의 가치를 다섯 가지로 정했다. 그중 제1의 가치는 ‘정직’이다. 어떤 순간에도 서로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거나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모면하지 않길 바라고, 나 또한 그렇게 살기를 추구한다.



글을 쓰는 데에도 정직한 태도가 중요하다. 누군가는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이 분리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실제로 책을 읽고 기대했던 이미지와 작가가 달라서 놀라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책을 읽고 좋아했던 작가의 사생활을 밝혀졌을 때 몹시 실망하고 팬심이 떠나는 예도 있다.


글은 또 하나의 페르소나를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글쓴이는 글 뒤로 숨어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숨기고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그 페르소나를 자신의 참모습으로 착각하도록 만든다. 본인도 자신이 만들어 낸 이미지가 자기 자신인 양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는 어쩌면 위험한 놀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거짓으로 만든 글 속의 페르소나는 결국 글 쓰는 사람을 버텨내지 못하게 만든다. 지킬 앤드 하이드처럼 극단의 얼굴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글을 쓰다 보면 자신의 진실을 말하고 싶은 욕망이 투영된다. 사람은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진실을 말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그 간절함이 글을 쓰도록 이끄는 것이고, 글을 쓸수록 저만의 내밀한 이야기를 쓰게 된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 또한 그러한 간절함과 마주했다.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진실한 고백의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온 과정을 돌아봐야 했다. 결국 그간 꽁꽁 숨겨두고 차마 열어보지 못한 비밀의 방을 열어보기로 했다. 글쓰기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그 문 앞까지 도달하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글을 쓰면서 어느새 그곳에 도착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나 나의 외모와 겉으로 드러나는 삶을 보고는 굴곡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 여기곤 한다. 스스로도 이 정도면 평범하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자평한다. 그러나 ‘평범’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고, 정의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키울 때도 그저 평범하게 자랐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각자마다 지닌 평범의 형태는 가지각색이다. 그리고 아무리 평범해 보이는 이들도 각각의 삶 속으로 들어가면 그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인생의 무늬를 만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각자의 독특한 무늬를 알아보게 해주는 특별한 안경이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는 그동안 보잘것없이 평범하다고 여겨왔던 내 삶이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고, 나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용기를 낼 수 있게 했다.

  


브런치는 궁극적으로 브런치 북을 발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매거진이란 이름으로 글의 주제에 맞게 카테고리를 구성하고, 매거진에서 발행하는 글의 수가 10개가 넘는다면 그것을 다시 엮어서 브런치 북으로 발행할 수 있다. 실제로 책을 구성하는 것처럼 목차를 구성하고, 짧게 브런치 북 소개를 한 후에 발행한다. 그렇게 발행된 브런치 북은 마치 전자책처럼 독자들의 선택을 받아 책처럼 취급받게 된다. 브런치의 이러한 기능을 알고, 나도 브런치 북을 발행하고 싶다는 꿈을 꾸며 글을 써보기로 했다.      


브런치 작가를 신청할 때는 블로그에 썼던 주제의 연장으로 엄마표 영어 진행기를 다룬다고 했지만, 브런치에서 진짜 쓰고 싶은 글은 나의 이야기였다. 뚜렷하게 어떤 이야기를 구성할지 모른 채 그저 때마다 떠오르는 재료를 가지고 식사를 준비하듯 글을 썼다. 거대한 목표를 잡지 않고 일단은 제약 없이 마음껏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았다. 분량의 제한을 두지 않고, 독자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기로 다짐하며 글을 쓰는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글을 쓰다 보니 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게 됐고, 결국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지점에 다다랐다.


바로 아빠에 관한 이야기였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기 8일 전에 아빠는 황망하게 떠났다. 예고 없는 죽음은 아니었다. 당신이 늘 말했던 대로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 고향 지역 농협에서 주변의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살아오셨던 나의 아버지는 여러 상황에 휘말려 일찍 퇴직하셨다. IMF로 인한 명예퇴직이 매서운 바람처럼 불어올 때를 지나오시며 자신은 그 바람에 쓰러질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지만, 당시 다른 사건까지 휘말리며 스스로 그만두셨던 것 같다. 은행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분이셨기에 나름 치열한 계산을 하고 나온 것도 있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고모부를 든든히 믿고 그간 고모부를 통해 서울에 투자했던 것을 밑천으로 제2의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보자는 원대한 꿈을 꾸셨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아빠를 받아주지 않았고, 든든히 뿌리내리고 있던 아빠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서울에 올라와서 아빠는 24시간 영업하는 자영업자로 살았다. 그러는 동안 아빠의 정신도 24시간 풀가동되며 쉬지 못했고, 그것은 우울증이란 보이지 않는 병을 얻었다. 우울증으로 아빠는 눈에 띄게 변했고, 무엇보다 스러져 가는 아빠를 지켜보는 나머지 가족들도 예상치 못한 전환을 맞이하며 휘청거렸다. 삶의 의지를 빼앗기며 무기력하게 그저 ‘죽고 싶다’를 외치며 좀비처럼 변해가는 아빠를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서울에서 중요한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내 옆에는 우울증에 잠식당한 아빠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때론 무관심으로, 때론 악다구니로 아빠를 마주하던 그 시절을 나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빠는 결국 우리를 배신하고 스스로 그 길로 가셨다.




미안함과 죄책감, 억울함과 서글픔, 그리고 분노가  얽혀있던 나의 감정을 제대로 돌아볼 새도 없이 둘째 아이를 키워내야 했다. 생명의 상실은 또 하나의 여린 생명을 돌보면서 채워진다는 인생의 신비를 경험했다. 예민하고 까칠했던 아이를 키우는 것은 육체적으로 몹시 힘들었지만, 그 덕택에 아빠를 생각하며 정신적으로 힘들 여유는 부릴 수 없었다.


그렇게 아빠의 죽음을 잠잠히 돌아보지 못하고 지나온 시간이 어느새 8년을 넘어가고 있던 때였다. 그토록 예민했던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줬고, 여전히 까칠한 기질은 남아있지만 스스로 제구실을 제법 해내는 아이로 컸다. 그리고 그 아이 옆에서 어느새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도 생긴 것이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결국에 나는 숨겨둔 아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열고 싶지 않은 그 비밀의 방을 통과해야만 했다. 결국 용기를 내서 브런치에 아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한 이야기는 깊은 주머니에서 우수수 내용물이 떨어지듯 펼쳐지게 시작했다.


정리되지 않고 알 수 없는 모양으로 구겨져 있던 감정의 실타래들이 서서히 풀렸다. 미처 알지 못했던 아빠와 나의 연결 고리들이 글을 쓰면서 보였고, 그 연결 고리를 붙잡고 거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 이야기도 펼쳐낼 수 있었다. 슬프고 행복했던 이야기, 아프고 치열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글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참 많이 울고 아픔을 토해냈다. 차마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 요청을 할 수도 없었는데, 놀랍게도 글을 쓰면서 내 안에 상처받은 아이가 치료받았다. 투명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었다.



글은 진실할 때 강력한 힘을 쏟아낸다. 브런치에 아빠 이야기를 하는 동안 꽤 많은 분의 격려와 지지를 얻었다. 외부의 반응을 기대하며 썼던 글이 아님에도 아빠 이야기를 쓰는 동안 많은 글들이 브런치  베스트 글에 올라갔고, 다음 포털에서 메인 글로 뜨는 경험을 해보기도 했다. 나의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감동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경험은 계속 글을 쓰게 만드는 또 하나의 강력한 동력이 됐다. 그렇게 나는 토해내듯 거침없이 아빠 이야기를 썼고, 결국 한 권의 브런치 북으로 발행하면서 들키고 싶지 않았던 방을 당당히 통과해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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