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쓰기
대학 시절, 나의 멘토가 있었다. 그분은 육체적인 눈의 감각은 멀어서 암흑 가운데 사는 장애인이셨지만, 가시 세계의 그 너머를 더 멀리, 더 깊이 볼 수 있는 분이었다. 그분은 늘 내게 네 인생의 '베이스캠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낮은 산을 오를 때는 굳이 베이스캠프가 필요 없지만, 에베레스트 같은 높은 산을 오를 때는 반드시 베이스캠프가 필요하다. 목적지를 향하여 오를 때, 함께 오를 동지가 필요하고 지쳤을 때 머물면서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캠프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긴 인생 여정에도 견고하고 잘 정비된 베이스캠프가 있어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고 늘 말씀하셨다.
실제로 처참하게 방황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에 만났던 그 공동체는 청춘의 찬란함을 찾게 해준 베이스캠프가 돼주었고, 그곳에서 내 삶의 평생 동반자인 신랑을 만났으니 참 감사한 일이었다. 요즘 그분이 말씀하셨던 그 '베이스캠프'가 다시금 떠오를 때가 있다.
빨강머리 앤에게는 초록색 지붕 집의 다락방이 드넓은 세계를 향해 푸른 꿈을 펼치게 해 줬던 베이스캠프였다. 결혼하고 가정을 이룬 나에게는 우리 가족이 일차적으로 베이스캠프일 것이다. 그럼에도 난 독자적으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나의 베이스캠프를 꿈꾼 것 같다. 그것이 지금은 '글쓰기'의 세상이 됐다고 감히 고백할 수 있다. 글을 쓸 때 나만의 세계로 홀로 침잠해서 마음껏 뒹굴고 사색하며 나의 진지를 구축하는 그 시간에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더 나아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도 한다.
정여울 작가의 <끝까지 쓰는 용기>를 읽으면서 ‘글쓰기’가 무엇보다 견고하고 튼튼한 내 인생의 베이스캠프가 될 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삶은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처럼 거창하지 않고, 동네 뒷산처럼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는 것 같아서 초라해서 거창하게 ‘글쓰기’로 베이스캠프를 구축하는 것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많다. 정여울 작가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에게 분명하게 말해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쓰고 있는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야 진정으로 집중하고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거든요. 나의 문제를 폄하하지 마세요. 사적인 이야기라고 자신의 삶을 낮추지 마세요. 나의 이야기를 중시하되, 나의 삶을 타인의 삶으로 확장할 수 있는 교집합을 찾으세요.
정여울, <끝까지 쓰는 용기>
가스펠 <소원>의 가사처럼,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 직한 동산이 되길, 내가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임을 나는 글을 쓰면서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곤 한다.
다만 그 걷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나의 발자국을 분명하게 꾹꾹 남기고 싶다. 우왕좌왕,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며 이리저리 헤매는 자가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만의 글을 쓰는 행위로 내 삶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용기를 내고 싶다.
“글쓰기를 통해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와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쓰지 않고는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정확한 단어를 고른 뒤 뜻이 통하도록 문장으로 빚어내야만 비로소 생각과 감정이 명쾌해지니깐요. 무엇이든 글로 써야 오롯이 내 것이 됩니다. 일주일, 한 달, 일 년, 심지어 인생을 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에 녹여두지 못한다면 한순간도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정여울, <끝까지 쓰는 용기>
끝까지 쓰기, 안전한 나의 베이스캠프에서 힘을 얻어 다음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