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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Oct 19. 2023

엄마는 현재진행형

오늘도 흔들리며 나아가는 중입니다

그 어떤 소유도 필요 없다고 여긴 적이 있다.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만했고, 둘이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이런들 저런들 상관없었다. 남들은 철이 없다고 여겼을지라도 남편과 나는 진정한 사랑이라 확신했고, 순전한 마음으로 결혼했다.


10평도 안 되는 다세대 주택 허름한 집에서 전세로 신혼집을 얻었다. 방음도 안 됐고, 겨울이면 보일러에 ‘물 보충’이라고 경고음이 울리며 빨간불이 깜빡이는 날이 온전한 날보다 더 많았다. 물 보충이란 메시지는 반대로 물을 빼줘야 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둘이 외부 주차장에 있는 보일러에 매달려 물을 뺀다고 낑낑대는 추운 날을 질리도록 보냈지만, 우리는 그마저도 마냥 즐거웠다. 욕심이 없었다기보다는 당시에는 그저 서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 서로의 존재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그저 함께하는 것으로 삶의 의미가 충분했다.


13년이 지났지만 난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며 서로에게 충만함을 누린다. 다만 달라진 것은 엄마란 정체성을 얻으면서 그 사람에게만 향하던 시선이 이제는 너무도 많은 곳에 분산된다는 것이다.


 


새 생명을 품고 낳아 키우는 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전개였다. 동영상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은 데로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완전한 오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들어오면서 완전히 다른 세계로 진입했다. 우리를 가장 곤욕스럽게 한 것은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로나 다짐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아이를 낳고 수없이 밀려오는 욕망에 시달리며 번민했고, 그 욕망을 마주할 때마다 밀려오는 비교 의식, 질투심에 점점 납작해져 갔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다음에는 나 스스로가 한심해서 자기혐오와 죄책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저 나로만 살아갔다면 이리도 많은 욕망과 사투를 벌일 일이 없었을까. 엄마로 살아가기에 이리도 험난한 과정을 겪는 것일까 하는 원망을 한 적도 있다.


“욕망에 항복하기 위해선 자신의 욕망이 어떤 건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숲 속의 자본주의자> p.79


애초에 원하는 게 없으면 실망도 없다고 한다. 개인이 지속적으로 평화로워지려면 욕망을 줄이라고 한다. 욕망을 줄이는 것이 가능할까? 나의 경험으론 욕망은 나의 의지로 늘어나고 줄여지는 속성의 것이 아니었다. 예상치도 못한 지점에서 불시에 날벼락처럼 찾아왔다. 초대받은 이웃의 집에 놀러 갔을 때 맞닥뜨린 화려한 인테리어를 봤을 때처럼. 급작스레 질투와 시기가 불타올랐고, 어김없이 그 욕망의 여파는 내 일상의 곳곳으로 깊숙이 침투해서 이전까지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했던 것을 불평하게 했다.


내 가족, 아이들 그리고 소유가 생기면서 수많은 대상과 비교하며 욕망과 격전을 벌인다. 도무지 이길 수 없는 강력한 적으로 맞서야 하는 것인지, 그저 정기적으로 찾아왔다 떠나는 손님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대부분 사람은 욕망이 이끄는 길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걸어가고 있다. 그것을 감히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나는 도무지 그 욕망을 따라 남을 이기는 것만이 삶의 목적으로 두고 살아갈 수 없었다. 두 아이에게 그렇게 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엄마가 먼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글쓰기는 나의 욕망을 마주하는 방법이 됐다. 누군가와 비교로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일 때 나는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썼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글로 표현하는 능동적인 자세를 취한 것이다.


욕망에 관해 쓰기 시작하니 내가 다스릴 수 있는 것과 어떤 방법으로도 다스려지지 않을 것들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다스릴 수 있는 것들은 시각을 바꾸고 결핍을 감사로 바꾸는 태도를 취하려고 의지적으로 노력했다. 욕망이 피어오를 때마다 거꾸로 지금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할 것들을 찾아봤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시각의 전환이 일어날 때 욕망을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각의 전환을 시도하고 감사로 바꾸려고 해도 도무지 타협되지 않는 지점의 것들도 있었다. 그러한 지점에 다다랐을 때는 그것을 원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을 원하는 나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그것을 가지기로 했으면 그것을 소유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로 다짐했다.


글을 쓰면서 그것의 구분이 선명해졌고,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욱 명확해졌다. 그리고 그 기준이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며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을 힘도 키울 수 있었다.


욕망을 마음껏 따르면 타락하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욕망을 극대화시켜 거의 무한대의 소비를 부추기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만의 고유한 욕망과 욕구를 정확하고 정밀하게 아는 것이 오히려 소비의 피곤을 줄여준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아니라면, 아무리 싸도 갖지 않는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칭송하는 가치라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추구하지 않는다. 넘쳐나는 지식 사이에서 내가 정말 궁금해서 알면 내게 기쁨을 주는 것만 파고든다. 그렇게 나의 욕망을 소중하게 탐구하다 보면 나와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점점 너그러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숲 속의 자본주의자> P.86



나의 욕망과 나의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 한쪽이 지나치게 무거우면 삶은 중심을 잃고 쓰러지게 된다. 어느 한쪽에 맞춰서 다른 쪽의 무게를 더 싣던지, 아니면 다른 한쪽에 맞춰 한쪽의 무게를 덜던지 해야 한다. 보통은 욕망의 크기가 현실의 삶보다 크기 마련이다. 대부분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한쪽에 쏠린 채 기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시소 위에 올라가 그 둘의 무게를 정확히 재보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 현실을 객관적으로 살피는 것도, 내 안의 끊임없이 솟아나는 욕망을 마주하는 것도 모두 어려운 일이다.


나는 쓰면서 시소 위에 그 둘의 무게를 날마다 잴 수 있었다. 지금 내 삶이 나에게 요구하고 있는 무게는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글을 쓰면서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현실이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그리고 내게 불쑥 찾아드는 욕망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며 어디로 뻗어가길 원하는지 마치 제삼자가 외부에서 관찰하듯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힘이다.




글쓰기가 그 둘의 무게를 평형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까. 나는 쓰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한다면 가능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느 한쪽에서 몽땅 무게를 줄이거나 더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날개를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흐린 날은 한쪽 무게를 덜어주고, 또 해가 쨍한 어느 날은 한쪽 무게를 더하면서. 그렇게 평형을 이루어 가는 방법을 찾아간다면 분명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글 놀이터에서 시소를 타며 평형을 이루고자 기우뚱거리지만, 포기하지 않고 날아가려는 중이다.


엄마는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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